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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렌지

아픈 손가락 2019. 4. 6. 17:54

몇년 전 부엌 씽크대와 수납장을 새로 하면서 쿡탑으로 바꿨던 가스렌지를 버리고, 2월에 전기렌지를 들였다. 가스렌지로 음식을 조리하면 불완전 연소된 가스 때문에 집안에 일산화탄소 농도가 엄청 높아 환기가 필수라는 말도 들었지만, (그래서 할아버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생 부엌에서 조리를 많이 해온 할머니들이 치매에 걸리는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그보다는 작년부터 깜빡깜빡 건망증이 심해져서 자주 냄비를 태우는 엄마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이 들면 미각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고 후각도 많이 둔해지는지, 엄마는 국이나 찌개를 데우려고 가스불을 켜놓고는 뒤 돌아 앉아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타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하셨다. 기껏 아침에 혼자 차려 드실 때 데워드시라고 한밤중에 신경 써서 끓여놓은 쇠고기 뭇국이나 된장찌개를 한끼도 제대로 못먹고 새까맣게 태워버릴 때는 정말... 눙물이 앞을 가렸다. ㅠ.ㅠ 일주일이 멀다하고 시커멓게 된 냄비를 닦으면서 화도 났지만 이러다 엄마가 집을 홀랑 태워먹지나 않을까 두려워졌다. 넘친 국물 닦던 행주를 가스렌지 옆에 그대로 놓았다가 불을 낼 뻔한 적도 있었으니...

암튼 불안불안하던 차에 정수기 렌탈 업체에서 전기렌지 행사기간이라며 살살 꼬드긴 김에 홀라당 넘어가, 가스렌지를 없애기로 한 거다. 물론 걱정이 없진 않았다. 자타공인 '기계치'인 엄마가 전기렌지를 제대로 사용하실 수 있을까? 도시가스 중간밸브도 잠가놓으면 당황해서 가스불을 켜지 못해 노상 중간 밸브를 열어두고 살아야 했는데 말이다. 

걱정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전기렌지 사용법을 '나름 세심하게' 메모지에 적어 렌지 옆에 붙여놓았음에도 엄마는 두 달이 다 되가도록 사용법을 익히지 못했다. 가스렌지는 손잡이만 눌러 돌리면 단번에 불이 켜지는 데 반해 전기렌지는 먼저 전원을 켜고-->냄비 위치를 정해 누르고-->불세기 숫자를 누르는 3단계 행동을 거쳐야 불이 켜진다. 이 과정을 너무 오래 뜸들이면 삐삐 거리면서 또 전원이 자동으로 꺼진다. 가스렌지처럼 불이 붙었는지 한눈에 확인도 어렵다.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가 징~ 하고 들리지만, 보청기를 껴야 하는 엄마의 청력으론 그게 잘 안들리는 것 같다. ㅠ.ㅠ 그나마 3구 전기렌지 중 한 군데는 인덕션이 아니라 빨갛게 불이 들어오는데, 그곳만 사용하시라고 집중적으로 교육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해서 요즘 엄마는 전기렌지와 씨름하다 포기하고 '전자렌지'에 국이나 찌개를 데워먹는 방법을 택하거나 아예 국물요리를 포기하기 일쑤다. 왜 자기 혼자 있을 때 누르면 잘 안되는지 당신도 잘 모르시겠단다. 내가 보는 앞에서 3단계 작동법을 시연해보라고 하면 또 곧잘 하시던데... 물론 간혹 혼자서 '성공적으로' 전기렌지를 켜 국을 데워드신 적도 있지만, 그럴 땐 또 다 데운 뒤에 '끄기'를 누르지 않아서 또 다시 국 한 냄비를 홀라당 태워버린 전적이 2번이나 있다. 잠자다 말고 타는 냄새에 놀란 내가 뛰쳐나와 전원을 껐으니 망정이지. 엄만 내가 뛰어나와 불을 끈 뒤에야 비로소 탄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전기렌지 사용법을 적은 글귀가 너무 헷갈리나 싶어 다시 더 간단하게, 그림까지 곁들여 붙여 놓은 적도 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1, 2, 3단계를 거쳐야하는 작동법 자체가 엄만 그냥 복잡하게 여겨져 싫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엄마가 더 복잡한 스마트폰도 쓰시면서, 카톡으로 사진도 보내고, 찍은 사진 편집도 해 저장할 줄 알면서, 전기렌지 3단계가 뭐가 그렇게 어렵다는 건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자, 정말로 기계치라서 스마트폰도 전화 걸고 받고, 카톡과 문자, 사진찍기 이외 기능은 전혀 쓰지 않는다는 후배 하나가 자긴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된단다. 햄버거집이나 새로 생긴 쇼핑센터 푸드코트 같은데서 무인계산기 앞에만 서면 얼마나 진땀이 나는지 모른다나. 그 친구는 폰뱅킹, 인터넷뱅킹도 할 줄 몰라 은행업무도 ATM 머신을 꼭 찾아다니는데, 머잖아 자기 같은 사람은 퇴출 인류가 될 수도 있겠다며 걱정을 했다. 그러니 전자렌지 가지고 엄마한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올해로 79세가 된 엄마는 또래들 중에선 나름 인텔리고 지적인 욕구도 많으며 이 동네에선 꽤나 세련된 (아프지 않을 때만!) 할머니로 통하지만 그간 여러 지병을 앓아오며 자기가 되게 늙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건강과 관련해서 내가 조금만 잔소리를 할라치면 듣기 싫어서 내 입을 막으려는 수단으로 '내가 빨리 죽어야지' '빨랑 죽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 카드를 휘두른다. 으익! 당뇨병환자임에도 단것, 열령 높은 것만 탐닉하며, 결과는 나 몰라라 하는 엄마를 보면 딱 유치원생 수준이니 그렇게 대해야한다고 마음을 다지면서도, 아직은 건망증 수준일 뿐 치매환자도 아니고! 우울증이 심하지 않을 때는 제발 든든한 우리 엄마로 자식들 입장과 사정도 좀 배려해주는 주는 마음을 품어주시길 바라게 된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변화에 적응 못하는 것이 노인의 특성이라지만, 엄마가 스마트폰에 적응해 어느새 중독자가 되어 하루종일 들여다보시는 것처럼 설마 전기렌지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지겠....지? 꼭 그래야한다. 모녀가 자꾸만 부딪치는 건 까탈스러움이나 잘난척의 정도가 둘 다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란 걸 느끼는데 ㅠ.ㅠ 엄마의 현재가 미래의 내 노년의 한 모습이라면 너무 슬프다. '너도 늙어봐라'고 장담하는 엄마한테 난 좀 다를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 욕심일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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