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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치료기

투덜일기 2013. 9. 27. 17:40

나는야 가을 타는 여자. 겨울 가고 봄이 오면 펄펄 날기라도 할 것같은데, 확실히 가을이 되면 심신이 축 처진다. 추위를 많이 타서 혹독한 겨울이 오는 게 두렵기 때문이라고 나름의 이유를 대보지만, 의학적으로는 일조량의 변화 때문이라고 들었다. 보통 사람들도 그럴진대, 우울증 환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올 여름 유독 길고 긴 장마와 무더위, 열사병의 가능성 등등으로 집밖 운동은 몇달간 할래도 못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날씨 청량해지자 곧 우울증이 도진 엄마는 악순환의 덫에 빠졌다. 운동도 못해, 햇빛도 못 쪼여, 먹던 약도 안 들어, 홀로 외출도 못해...  노친네들의 근력은 며칠만 사용하지 않아도 확 사라지는 게 확실하다. 아 글쎄, 억지로 실내 자전거 좀 타보시라 꼬드겼더니 다리를 못 올려서 자전거에 앉을 수가 없단다. ㅠ.ㅠ  

 

주치의는 싫어도 자꾸 밖으로 나가보시라고 엄마한테 운동을 독려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는다는 걸 알기에 가을, 겨울 동안 빛치료기를 사용해보라고 권했다. 밤이 지나치게 길어 전국민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북유럽에서 많이 상용하는 거라면서.

 

의료기상에서 파냐고 물으니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라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구글링으로 그럴싸하고 예쁜 걸 찾아내긴 했는데... 한국에서 파는 건 하나같이 이렇게 안 생겼고 훨씬 조악하다. -_-;

 

화롯불 쪼이듯 까칠하고 암울한 두 모녀가 인공 조명 앞에 웅크리고 앉아 나란히 빛을 쪼이고 나서 머릿속에 고여 뭉쳐있던 나쁜 호르몬과 나쁜 생각들이 뾰로롱 사라져버리는 상상을 하니 뭔가 황당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늘 숨쉬고 사는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햇빛에도 엄청난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걸 꼭 이렇게나 해야 깨닫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무기력한 나완 달리 세상엔 참 별걸 다 알아내는 능력자 인간이 많구나 싶다. 과연 얼마나 실제로 효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일단 울 엄니는 플라시보 효과에 민감한 분이시니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나저나 가을 겨우내 노상 뻗쳐놓고 살려면 무조건 모양이 예뻐야 되는데... 집요한 검색과 인터넷쇼핑 노하우를 총동원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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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까

투덜일기 2012. 11. 23. 22:54

이젠 어느 동네엘 가도 잘 찾아볼 수 없는 소형 서점이 최근 우리 동네에 생겼다. 제법 큰 플래카드를 두어 군데나 붙여놓고 개업을 알리는 서점이 걱정스럽고도 신기해서 일부러 언덕을 넘어 구경을 갔었다. 옛날 내가 다니던 학교앞 책방처럼 학습지 교재와 잡지가 주요품목이고, 잘은 모르지만 베스트셀러 신간 정도는 갖추어 놓은 것 같았다. 늦은 오후, 비좁은 책방에 당연히 손님은 한명도 없어서 차마 들어가도 될까, 인사 받고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나오면 안될텐데, 누구든 손님이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야지 마음먹고 버스 기다리는 척 한참을 기다렸으나 손님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읽지도 않을 책이나 잡지를 집어오기도 뭣하고, 딱히 사고픈 책(있느냐고 물어볼;;)도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줏대없이 그냥 돌아섰다.

 

얼마전엔 오래도록 비어있던 동네 입구 상가 한 귀퉁이에 '이탈리아 수제 버거'집이 생겼다. 응? 햄버거가 이탈리아 음식이었나? 의문도 잠시, 입구에 나무데크를 깔고 인테리어에도 꽤나 신경을 쓴 그 가게가 걱정스러워서 나는 오갈 때마다 안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주민이라고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강북의 오래된 주택가가 하루 중 활기를 띠는 때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 여학생들이 등하교를 할 때 뿐이고, 하나 있는 치킨집마저도 장사가 잘 안될 지경인데 햄버거집이라니.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듯 매번 부지런히 빈 테이블을 닦거나 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두 여인을 슬쩍 훔쳐보며 안타까웠다. 이미 '수제 햄버거'로는 동생이 뜨거운 맛을 본 뒤라 남일 같지가 않았다. 여중생들이 먹어봤자 떡볶이랑 김밥일 텐데 대체 누굴 대상으로 가게를 열었을까?

 

처음 한달은 통 손님이 든 모습을 못보겠더니 그래도 두어달 지난 요즘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사람이나 유치원 끝난 아이를 데리고 들른 엄마 손님 한 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가끔 보였다. 나만큼이나 그 햄버거집을 염려하던 울 엄니('수제' 햄버거집은 웬만해선 곧 망한다고 굳게 믿고 계심;;)는 오지랖 넓게도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 아줌마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왔다. '수제' 햄버거가 '단돈 천원'부터라 여중생들이 곧잘 사먹긴 하는데 그래봤자 임대료나 나오겠느냐고, 인건비까지 뽑긴 어려울 거라고. 커피는 맛있다더냐는 내 질문에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하기야 나도 커피 한 잔 안팔아주면서 말로만 걱정은!  

 

부디 내가 볼 때만 유독 그런 것이라면 좋겠으나 대부분 '개점 휴업' 상태가 분명한 두 가게를 보며 요즘 내 상황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주로 자고 먹고 놀고 쉬고를 반복하는 나날을 본격적으로 즐긴지 한달이 좀 넘었다. 말로는 거창하게  나도 안식년이라는 것 좀 누려보자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점휴업, 그냥 일이 없어 노는 것과 뭐가 다른가?

 

굳이 변명을 하자면 친구의 휴가에 맞춰 일을 빼느라 꼼수를 부리긴 했다. 허나 휴가가 한두달도 아니고 겨우 2주였으니 핑계거리밖에 안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고는 순전히 일을 하기가 싫어서, 이미 너무 늦어버린 계약마감에 쫓기는 게 숨막혀서, 아니 나도 나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출판 담당자만 계속 물먹이는 상황이 죄스러워서, 결국 두 건은 계약금 돌려주고 일을 포기했다. 사실 한권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라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멀미가 나서 다시는 부실한 원고륻 들춰보고 싶은 마음도 안드는 상황을... 과연 누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출판 담당자에겐 천인공노할 죄를 진 셈이지만 암튼 그땐 그랬다.

 

 그런데 그러고도 이상스레 마음은 편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17년간 번역일을 해오면서 한번도 사라지지 않은 조바심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내게 일을 주겠다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과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모든 프리랜서의 숙명적인 고민이 아니겠나. 원숭이 줄타기의 법칙을 아무리 고수한들 언제고 한두 번은 떨어지게 돼있다. 더욱이 단군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의 비명은 그저 엄살이 아니라 해마다 변함없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런데도 이 엄혹한 마당에 안식년을 즐겨보겠다는 용기가 참 가상할 지경이다. 

 

잠자리에 들어서 오늘 과연 뭘 했나 돌이킬 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무위도식하며 사는데도(어쩌면 그러기 때문에;;), 생각보다 하루는 참 빨리도 지나간다. 컴퓨터와 인터넷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것 같더니만, 일하기 싫어서 게으름 부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며칠씩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아무렇지가 않다. 대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긴 하지만, 부쩍 심해진 노안 덕분에 작은 화면으론 뭘 오래 보기도 어려우니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됐다.

 

뭘 좀 배울까, 운동을 할까, 텅빈 머리는 어떻게 채울까, 여행을 갈까, 빈한기의 삶은 어떻게 유지해야 좋은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허투루 하는 생각들은 당연히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우리 동네 서점과 동네 수제햄버거집처럼 나의 안식년도 과연 잘 될까, 하고. 그러고는 이내 눈을 질끈 감는다. 잘 되겠지 뭐. 서점과 햄버거집 주인들도 아마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결국엔 죽지만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없듯이, 잘 안되려고 뭔가를 벌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나. 나는 다만 뭔가를 '벌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일이다. 해보니 그건 퍽이나 쉽다. 무위도식, 이게 딱 내 적성이었는데 그간 몰랐던 게 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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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투덜일기 2012. 9. 18. 18:09

무서운 고양이 사진이 너무 많기도 하고 가끔 고양이 물품과 관련하여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서 즐겨찾기에서 지워버렸던 스노** 사이트. 지금도 즐겨찾기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이따금 궁금해져 찾아가본다. 어차피 주소도 어렵지 않고... 아마도 이유는 그곳 주인장이 스스로 우울증, 조울증 심증을 고백하며 블로그는 아예 닫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냥 남들이 지나가는 말로 증상이 그렇다고 하니까 겉으로만 인정하는 건지, 진짜로 상담이나 약물치료라도 받는 건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역시나 내가 환자의 가족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남들보다 조금 민감하게 넘기는 편이라는 것이 나의 오랜 관찰 결과인데, 일년에 네번이나 되는 환절기가 다 문제는 아니고 가장 불안함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역시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과 가을에서 다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아마도 줄어든 일조량과 호르몬의 관계라지. 사실 나도 이거 우울증 아닌가 싶게 가을은 좀 힘들다.

 

암튼 낮이 하염없이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저녁이 좀 일찍 찾아온다 싶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불안이 감지되는데, 그 시작은 지나친 씩씩함과 활동성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거기에 덧붙여 더 많은 '건수'를 만들어 온종일 돌아다니고 안하던 쇼핑도 막 하러 다니고, 양손 가득 무거운 찬거리를 들고 들어오기도 한다. 갑자기 집안일에 열의를 보이며 새벽부터 구석구석 먼지를 파내기도 하고 오래된 물건 정리도 하며, 그 어떤 잔소리를 해도 하하호호 기분이 좋다. 어떤 날은 집에 있으면서 종일 사방에 전화를 걸어 호호깔깔 목청 높여 대화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활기차고 건강해졌다며 반기는데, 절대 그게 아니다. 이른바 조증 상태이기 때문. 무기력한 울증 상태보다 더 나쁜 상황이고 곧이어 수렁같은 울증이 찾아올 것이라는 암울한 예고편이다.

 

오늘 문득 생각이 나 홈피에 가보았는데, 짧지만 비슷한 사연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발전적이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여 다행이다 싶긴 하다. 하지만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인정하면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쓸모없는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계속 의욕을 보이는 것은 조증 상태의 전형적인 반응.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붕붕 떠 있는 마음을 끌어잡아내리는데 안간힘을 쓰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늘 겪는 일인데 뭐, 좀 있으면 지나갈 거야, 걱정하지 마슈. 약 조절도 받았고, 일단 잠의 질만 더 나빠지지 않으면 최근 몇년 그래왔듯이 또 다시 수월하게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끝자락부터 내가 버럭버럭 성깔을 부리며 독 오른 짐승처럼 굴었던 건 어쩌면 환절기를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지레 겁먹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계절은 바뀌었고 해는 확 짧아졌고 노친네는 부쩍 부지런해져 노상 바쁘다. 슬슬 체력 떨어질 때도 됐으니 고비도 머지 않았다. 약간 엄살을 부리는 것이면 좋겠으나 스노**도 노친네도 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시 중간즈음의 평온을 되찾기를. 스산한 가을도 싫고 추운 겨울도 싫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은 역시나 환절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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