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이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5.17 아는 게 병 11
  2. 2011.03.24 잡념 15
  3. 2011.03.22 토론의 기술 10

아는 게 병

투덜일기 2011. 5. 17. 17:41

이 세상에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으며, 모든 감기약은 증상완화제일 뿐이다.
어차피 감기는 약 먹으면 2주, 안 먹으면 보름만에 낫는다.
물 많이 마시고 밥이랑 과일 잘 챙겨먹고 잠 잘자서 몸의 면역력을 높이면 감기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감기약 먹으면 졸리고 멍해서 정신집중이 안된다.
감기약 먹고 운전하면 사고날 확률이 늘어난다.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본 것 같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지어주는 감기약의 알약 갯수를 보면 딴나라 의사들은 기함을 한다. 약 흡수 잘 되라고 소화제까지 처방하는 의사들 여기밖에 없다더라.

이상은 감기에 대한 평소 나의 지식이랄까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근거로 거의 3주간 계속 버텼다. 이번 감기는 다른 증상 없이 그냥 기침만 나왔던 터라 더욱 소신껏 밀고 나갔던 것 같다. 사실 무작정 버틴 건 아니고 지난번 먹고난 테라플루도 몇번 먹어주었다. 크게 효험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기침도 낮엔 얼추 괜찮다가 밤에만 좀 많이 나왔다. 원래 기압이 낮아져 기침은 밤에 더 심하진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지난주초엔 기침을 하느라 뱃가죽이 당기는 수준까지 이르긴 했으나 나로선 별로 불편할 게 없었다. 나을듯 나을듯, 떨어질 듯 떨어질듯 하다가 밤만 되면 다시 도지는 기침이 그저 얄미울 정도였다. 그런데 왕비마마는 나의 기침을 못견뎌했다. 기침 소리 들을 때마다 병원으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기침보다도 그놈의 잔소리가 지겨워 결국 어제 동네 내과를 찾았다. 목안을 들여다본 의사는 내 짐작과 별 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염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심하지 않다. 낮에 물 많이 마시고 체온관리 잘 하고 푹 쉬는 정도로 나을 수 있겠지만 약을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테니 이틀치 처방을 내려주겠다. +_+

주사는 맞고 싶으면 맞으라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당연히 안 맞기로 했다. 약만 타가지고 돌아와 어제오후부터 시간 맞춰 열심히 먹고 있는데.... 

젠장,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밭은 기침은 콜록콜록 똑같고 괜히 정신만 멍하다. 알러지 약까지 들어 종류도 6가지나 되는데 왜 효과가 없는 거냐!(콧물에다 몸살까지 겹쳤으면 약을 열개는 처방했으려나? -_-;) 엄마는 주사를 안 맞아서 그런다며 약 다먹고 내일은 주사까지 맞으라고 또 성화다. 나는 애당초 병원에 갔던 걸 후회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 것 같다. 의사와 약의 권위를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짜 약을 먹고도 30%쯤의 환자들은 증상이 완화된단다. 그래서 그런 착한(?) 환자들과 의심 많고 부정적인 태도의 환자들은 치료효과가 두배나 차이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 대신 역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걸 노시보 효과라고 한다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딱 그짝이다. 이 세상 감기약을 죄다 불신하는 나에게 감기약이 효력을 제대로 나타낼 리 없잖은가. ㅋㅋㅋ 병도 병이지만  나는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인 셈. 어쩌면 아는 게 병이 아니라, 불신과 회의가 병일지도...  역시나 믿을 건 내 몸과 오기밖에 없다 싶다.

이놈의 기침 감기 바이러스, 내 오늘부터 너를 물에 빠뜨려 죽여주마!
기를 쓰고 물을 마시고는 있는데...
계속 화장실 다니느라 귀찮아 죽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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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하나마나 푸념 2011. 3. 24. 02:35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떠났단다. '여배우'라는 말과 함께 내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을 두 사람이 바로 오드리 햅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는데, 이제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어리고 깜찍한 모습으로 <녹원의 천사>, <작은 아씨들>에 나온 리즈 테일러를 보면서 어린 나는 세상에 저렇게도 예쁜 사람이 다 있군, 하며 놀라워 했다. 인형처럼 생겼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도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리즈 테일러가 나온 여러 영화를 봤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과 함께 나온 <자이언트>에서의 모습이 내겐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늘 욕 먹고 씹히던 남성편력도 내겐 멋졌다. 남자만 여러 번 결혼하란 법 있나. 게다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고혹적인 입술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나라도 혼이 쏙 빠져나갈 것 같던데. 다만 오드리 햅번처럼 외형적으로도 자연스레 아름답게 늙어가지 못한 게 안타깝긴 해도 온갖 지병과 싸우며 끊임없이 사회에 기여한 노력은 똑같이 우러러보인다. 대중과 미디어가 아무리 제 멋대로 소모해버리려고 파고들어도 당당히 버텨냈으니 이젠 고이 잠들어 편히 쉰다고 생각하면 될텐데, 왠지 기분이 착잡하다. 

리즈 테일러의 부고가 아니어도 온종일 잡념이 많아 별로 일을 하지 못했다. 학력위조 파문과 정치권 특혜 의혹으로 언론을 홀딱 뒤집어놓았던 장본인이 이번에는 또 책으로 세상을 들쑤시고 있다. 당시엔 나도 한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학력위조 문제가 이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주의가 낳은 폐해라 생각했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질겅질겅 씹어대듯 한 여자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다. 도무지 실체가 잡히진 않지만 누구나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연예계 성상납 비리와 마찬가지로,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오르내리던 수많은 정치권 인사의 개입은 진실 여부를 떠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남성 중심의, 상품으로서의 여성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그 여자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요번에 대대적인 출판기념회를 열어 선정적인 회고록을 내놓은 걸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책을 냈을까? 하기야 요즘은 굳이 자비출판을 하지 않더라도 책 내는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느 쪽에서 기획을 하든 일말의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나무에게 부끄럽든 말든, 일단 책의 형태로 출간된 책은 세상에 나올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는 출판계의 속설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꾸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어처구니 없고 힘빠지는 소식은 그런 황당한 자서전이 벌써 나온지 하루만에 2만부가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나는 출간기념회도 그렇고 책 속에 언급되었다는 정치인의 이름도 그렇고, 그 여자가 들고 나왔다는 명품 가방이 더 큰 이슈가 되는 찌라시 언론에 그저 코웃음만 치고 있었는데, 이 나라 출판시장이 겨우 그 꼴이라니 맥이 탁 빠졌다. 노이즈 마케팅이든 아니든 자서전을 낸 그 사람으로서나 출판사 입장에선 두손 들고 환영할 일일 것이다. 이 엄청난 불황에 초판을 5만부 씩이나 찍어서 1, 2주 만에 2쇄 인쇄에 돌입하는 책이 어디 흔한가. 몇년 전까지만 해도 백만부 이상 팔리는 초베스트셀러를 일년에 서너 권씩 냈던 어느 대형 출판사도 작년에는 10만부 이상 팔린 책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게 요즘 현실이다. 최근 1, 2년 새 초베스트셀러 경향을 보면, 인기 작가 몇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예인이나 아이돌의 팬덤에 편승해 낸 책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연예계와 가요계 뿐만 아니라 출판계 마저도 연예인과 아이돌이 접수하는 거 아니냐고 씁쓸해 하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라던데, 정말 출판시장에서 이제 팔리는 책은 떠들썩한 유명세를 업어야만 나올 수 있다는 뜻일까?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번역을 하든 글줄만으로 밥벌이를 제대로 하는 게 그리 쉽지 않고,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출판계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남은 한 가지 잡념은 가끔 주제도 모르고 펄럭대는 내 오지랖에 대한 자책이다. 주변에서 간혹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지인들이 있으면 펄펄 뛰며 말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연하게 아련한 희망을 심어주지도 않는 편이다. 그저 혹독한 현실을 일러주고 스스로 가능성을 점쳐보도록 이끄는 것밖엔 해줄 수가 없는 걸 어쩌랴. 그리고 책이란 게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다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문장 역시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친구의 문장력과 외국어 이해력을 속속들이 알 방법 또한 없다. 그러니 나로선 얇디 얇은 연줄을 대어줄 순 있으되 그 이상의 생존은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달렸다. 실제로 지난 십수년간 우연한 기회로 몇몇 지인들을 '추천'해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출판사든 초짜 번역가를 선뜻 쓰려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책의 검토나 시험번역의 기회를 어렵사리 주선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연줄'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서로 운대가 맞아야지 소심의 극치인 내가 먼저 불쑥 누군가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섰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양쪽에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온 적이 별로 없다. 시험번역을 통과했던 친구 하나는 결국 자기 이름으로 번역서를 한권 내기는 했지만, 자기는 죽어도 번역으로 못 먹고 살겠다며 떨어져나갔다. 현재는 학원 원장님이신데, 나더러도 만날 그 골빠지는 일 때려치우고 고액과외나 하라고 권유한다. 친구 하나는 안타깝게도 시험번역 단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수년에 걸쳐 서로 재고 테스트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거쳐 동료 번역가 대열에 접어든 친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출산 후 육아에 전념하다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아무데도 찾아주는 데가 없다고 괴로워하는 중이다. 얼마 전 다행히도 검토 일을 하나 연결해줬건만, 작품 분석력이 떨어져 안되겠다는 출판사 지인의 귀띔을 들었다. ㅠ.ㅠ 다른 친구 하나는 세번째 책이 요번에 나올 예정인데, 마침  잘 아는 후배가 그 책의 외주 편집을 맡았다. 뜻밖에도 문장력도 없고 원고의 첫장부터 오역 투성이라면서 온통 새빨갛게 된 교정지를 후배가 내게 보여주었다. 그 친구에게 일을 맡긴 최종 결정은 출판사가 했음에도, 내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친구에겐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앞으로 절대로 사람을 추천하지 않기로 홀로 결심만 세웠다. 그러면서 총체적으로 또 다시 시작된 고민. 과연 나는 이 일을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잡념인데 잘 떨쳐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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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은 참 토론을 못한다. 지금은 아예 볼 생각도 안하지만, 손석희 교수가 진행을 하던 시절의 <100분 토론>을 보아도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주장을 바락바락 우겨댈 뿐인 패널들을 보는 게 지치고 짜증스러워 중간에 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다. 다른 토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고, 토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국회 청문회는 아예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다. 과거 청문회에서 '스타'로 떠오른 정치인을 다분히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조목조목 논리로 검증하는 건 못배우고 대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호통치는 것만 따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보면 온 국민이 토론에 익숙하지 않고 토론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 평생 주입식 교육만 받아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앞뒤 맥락에 맞는 언어와 주장으로 토론에 끼어든단 말인가. 대학에서도 대부분이 강의식 교육만 받는 실정이니까. 그러다 보니 소수 세미나 수업으로 진행된다는 대학원 수업도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수업마다 발제자가 있어 발제문을 줄줄 읽고 나면 몇몇 도드라지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상투적인 질문이, 또는 너무 뻔한 질문이 이어지고 그나마 성의 있는 교수의 경우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주제를 아우르는 정도다. 페미니즘 분석의 경우 간혹 재미있는 말들이 오가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상대의 논리적 오류를 짚어내는 토론으로 무언가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는 그저 놀라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는 때가 많았다. 세미나식 수업의 목표는 발제자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다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인데,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이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과 주장을 이리저리 참고해 이른 대학원생 수준의 결론엔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도 사실 없다. 괜히 누군가 뭣 하나 물고 늘어져 수업이 길어지면 오히려 눈총만 받을 뿐.

마이클 샌델 본인도 의아해했다는 한국인들의 '정의' 열풍에 힘입은 덕분인지 EBS에서는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라는 <정의란 무엇인가> 수업 동영상을 벌써 몇번째 방영하고 있다. 빠짐없이 전회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연말엔가 처음 채널을 돌리다 프로그램을 알게 된 이후, 부러 시간을 기다려 일부러 찾아본 강의 수업에서 나는 강의 내용은 일단 제쳐두고 교수가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학생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라 논리를 펼치고, 각자 생각에 따라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논리를 지원하고 보태다가 다시 강의 주제로 돌아와 다양한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토론식 수업법이 너무도 매력적이고 경이로웠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개인의 기본권은 얼마나 침해되어도 좋은지, 완전한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이익과는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주로 살펴보는 강의 내용은 사실 새로울 건 없는 것 같다(라고 주장하며 책은 안읽을 생각이다. 역시 나는 문자 매체보다 영상매체를 선호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음. ㅠ.ㅠ). 그런데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안고 모인 수많은 학생들이 본인의 입장에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거침없이 일어나 주장하고, 교수는 또 그런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을 이끌어내고 모든 학생들의 주장을 일일이 기억했다가(학생들의 이름까지!) 강의주제와 연결해 결론을 내리거나 철학적인 논리를 설명하는 외적인 강의 모양새가 참 감탄스럽다. 

내게 놀라운 건 자칫하면 바보 되기 십상인 편협한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도 매우 당당하고 나름 논리적 근거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교수가 이끄는 반대토론을 거쳐 학생들 스스로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게 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조단조단 또박또박 설명하는 마이클 샌델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 얼마나 정갈한 느낌인지. 하버드대학이나 서울대의 엘리트주의가 나라를 망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강의 동영상을 보며 불쑥 나도 저런 명강의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더불어 손석희 교수의 강의도 문득 궁금하다). 물론 나는 토론되는 사안에 대한 내 주장이 어느 쪽인지 자신이 없어서 (실제로 강의 동영상 보며 어느 쪽이 옳고 정의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주제들이 꽤 있었다) 절대로 손들고 나서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간혹 전해듣는 현실속 학교 현장은 여전히 한심스럽다. 중학생이 된 조카는 요즘 이른바 교사들의 '군기잡기' 분위기에 퍽 괴로운 모양이다. 자유로운 초등학교 분위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뭔가 부당하다고 느껴 이의를 제기하면 선생님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식으로 반응한단다. 나도 겪어본 일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처음이라 주도권 잡으려고 더욱 그럴 거라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일방적인 소통은 억울할 수밖에 없고,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다. 하물며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성적인 토론의 자질이 어떻게 싹틀 수 있겠나. 

예를 들어, 체육복 문제. 산꼭대기 학교의 특성상 대운동장은 건물 바로 앞이 아니라서 산너머 언덕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엔 절대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까지 시간 내에 갈 수 없다. 체육시간 전에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어야 한다. 체육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교실로 돌아와 다음 수업 이전에 교복으로 갈아입을 시간 역시 없다. 그런데 체육시간 바로 직전이나 직후에 배정된 일부 과목 교사는 애들이 '모양빠지게' 체육복을 입고 자기 수업을 듣는 걸 못견딘다. 다음 수업이 체육이든 아니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하든 말든, 자기 수업시간엔 모두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으라는 주장이다. 아 왜??? 물론 체육교사는 이전 과목 선생의 취향이 어떠하든 자기 수업시간에 늦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체육 수업에 많이 늦었다간 벌로 언덕배기 중간에 있는 감나무까지 선착순 뛰기를 몇번이나 해야할지 모른다. 딜레마다.

30여년 전에도 교사간의 알력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설마 중학교 신입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왜 아직도 그러고들 앉았는지! 물론 체육복을 입고 있어도 이해해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원칙이 뭔가 더욱 헷갈린 거다. 과거에 우리는 그나마 만만한 체육선생에게 부탁했다. 체육복 미리 입지 말라고 강요하는 선생을 설득해달라고. 결과는? 둘이 교권을 두고 으르렁거리며 싸웠을 뿐이다. -_-; 조카에겐 별 수 없이 과거 우리의 비법을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복 바지만 미리 갈아입고 위엔 교복을 입은 채 다른 수업을 받으라고. (그런데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복 웃도리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있는 건 정말 더욱 모양빠지는 일이다!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게다가 그 꼴로 화장실이라도 갈 때 학생부 교사에게 걸리면 '복장불량'이란 지적을 받는다. 체육복이면 체육복, 교복이면 교복을 입으라고. 대체 어쩌라는 거냐!) 그러고서 한편으로는 반장을 보내든지 해서 선생과 다시 협상을 시도해보라고 권했다. 교실에서 단체로 아이들의 왁왁대며 불평을 쏟아내는 건 교권에 대한 발칙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교사들이 좀 많은가. 은밀히 교무실로 찾아가 '간절히' 부탁하면 권위를 세울 수 있으니 혹 들어주려나... 물론 과거처럼 괜히 교사들끼리 싸움만 붙이는 수도 있겠지만. ㅎㅎ

아직도 윽박지르고 일방적인 주장을 강요하면 씨알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느 분야에든 많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기주장이 강한 요즘 아이들은 그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어린 조카들도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의견을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던데 교육학도 배운 사람들이 왜들 그러실까. 답답하다. 하기야 그러니까 너도나도 팍팍한 이 나라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조기유학을 보내거나 이민을 떠나는 것이겠지. 그리고 대대로 토론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모든 주요 협상 테이블에서 늘 불리할 수밖에 없을 테고. 

조카의 고민을 듣고 돌아온 탓인지 리모컨질 하다 걸린 EBS 정의 재방송을 또 한번 구경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나라 애들도 저렇게 멋지게 토론하는 어른으로 커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그저 시스템과 어른들이 문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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