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효리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가난했던 어린시절 얘기를 하는데, 화장실 갈 때 휴지 대신 쓰던 달력종이를 구두쇠 아버지가 엄격히 제한했다는 말이 나왔다. 어머나, 우리집 재래식 화장실에도 주로 금은방에서 주던 습자지 같은 그 일력 종이를 절반씩 잘라(그나마도 아껴야 하니까) 줄에 매달아 휴지 대용으로 쓰게 했었는데! 그게 국민학생 때였던가? 그러다 곧이어 좀 누리끼리한 재생 두루마리 휴지가 등장했다가 하얀색 휴지로 발전했던 듯하다. 개그콘서트 <네가지> 코너에서 촌놈 양상국이 노상 주장하는 것도 촌과 도시의 삶이 하나도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이듯, 극적인 삶의 변화는 물리적 공간과는 상관없는 세월의 흐름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집도 화장실에서 달력종이 대신 휴지를 쓰게 됐을 때 내가 제일 못마땅했던 건 엄마가 항상 두루마리 휴지를 꾹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어 봉에 꽂아놓는다는 점이었다. 둘둘 마구 풀려 낭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지만, 또 나는 휴지를 엄청 많이 풀어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으니 휙 단번에 잡아당길 수 없게 납작하게 눌러놓은 휴지 때문에 짜증이 났다. 해서 엄마가 납작하게 눌러놓은 휴지를 난 또 열심히 펴서 잘 풀리도록 해놓았고, 엄만 다시 납작하게 눌러놓는 사태가 반복되기도 했다. 요샌 그런 휴지가 아예 나오지도 않지만 우리 엄마 같은 알뜰파를 위함이었는지, 옛날엔 가운데 속지가 아예 처음부터 납작하게 눌려 타원형으로 휴지가 감긴 대형 두루마리 휴지를 팔았다. 그 납작한 홈 안에 휴지걸이 봉을 끼우려면 정말 낑낑대야 했을 정도다. 이제 더는 그런 넙적한 두루마리 휴지를 볼 수 없지만,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엄마는 화장실 휴지걸이에 두루마리를 새로 꽂을 때 한번 꾹 눌러서 둘둘둘 함부로 풀리지 않게 해놓았었다. 그나마 이젠 손에 힘이 딸리는 노인이 된 탓에 두루마리 휴지를 납작하게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다.
엄마의 휴지 절약은 그뿐이 아니었으니, '크리넥스'가 화장지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라고 생각했던 그 옛날부터 엄만 화장대에 올려둔 화장지를 쓸 때 꼭 반을 잘라 한번에 절반씩만 사용했다. 근데 난 코풀려면 한번에 두장은 겹쳐 써야해서 늘 핀잔을 들었다. '휴지공장하는 놈한테 시집을 보내든지 해야지 원! 휴지로 재산 거덜낼래?!'라는 것이 당시 울 엄마의 잔소리 레퍼토리. 한 참 세월이 흐른 뒤, 큰조카가 아기 때 우리집에 와서 놀 때면 이상하게 각휴지 한통을 다 뽑아서 방으로 하나가득 만들어놓는 걸 좋아했는데, 나랑 울 아버지는 그저 귀엽다고 (어차피 뽑아놓은 휴지는 다시 통에 넣어뒀다가 쓰면 되니까!) 허허거리는 반면, 엄마는 휴지 함부로 한다고 엄청 화를 내면서 조카를 혼냈다. 애 버릇 망친다고 우리까지 덩달아 혼을 내시고...
중학교 때, 지금은 학생인권침해로 사라진 책가방/소지품 검사가 한두달에 한번 불시에 있었는데, 소지해선 안될 물건을 적발하는 것도 목적이긴 했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필수 소지품목을 구비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른바 여학생스러움의 전형이랄 수 있는 손거울, 반짇고리, 손수건 또는 휴대용 휴지가 바로 그 필수 소지품이었다. 해서 학기초엔 아예 학교앞 문방구에서 저 물건이 다 들어있는 파우치를 팔 정도였다. 헌데 난 휴지가 겨우 열장 정도 작게 접혀있는 초소형 휴지론 만족할 수가 없었고 (일단 학교 가면 제일 먼저 책상 닦아야지, 코 풀어야지, 밥먹고 입 닦아야지, 볼펜 잉크똥 닦아야지...) 좀 더 두툼한 여행용 휴지를 꼭 들고 다녔다. 손거울과 휴대용 반짇고리야 팽개친지 오래지만, 꼭 가방에 휴지를 넣고 다니는 버릇은 직장인이 될 때까지도 이어졌었다.
조카들과 놀 때도 A4용지는 엄청 아까워 이면지 사용을 종용하면서 상대적으로 휴지는 마구 함부로 쓰는 내가 우스워보였는지 언젠가 셋째 조카가 한 마디 했다. A4용지도 나무로 만들고 휴지도 나무로 만드는데, 고모는 휴지는 하나도 안 아까워하더라! 새하얀 백지를 낙서용으로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아마존 밀림이 어떻고 인도네시아 펄프가 어떻고 잔소리를 해댄 주제에 휴지 아까운 줄은 모르고 쓰는 내 꼬라지가 어린 눈에도 모순이었던 거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방 쓰레기통엔 휴지가 언제나 제일 많고, 재활용에 힘써보지만(얼굴 살짝 닦은 휴지 바로 안 버리고 뒹굴리다가 먼지나 얼룩을 닦는다든가;;) 걸레 빠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태도로는 도무지 휴지를 아낄 방도가 없다. 일회용품 사용 자제를 위하여 환경운동가들은 코 풀 때도 손수건을 쓰라는데 어우 그건 쫌... ㅠ.ㅠ 행주를 사용하면서도, 북북 뜯어 더러운 걸 닦아버리는 용도로는 키친타월 역시 포기 못하겠는 걸 어쩌란 말이냐.
비데 사용 때문에 우리집에선 언제부턴가 두루마리 휴지도 세겹으로 된 걸 쓰게 됐는데, 꽃무늬나 곰돌이 모양까지 압착무늬로 새긴 휴지를 둘둘둘 마구 풀어쓰다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또 재생지에 형광증백제를 엄청 들이부어 만든 휴지가 피부건강을 해친다는 정보에는 귀가 솔깃하다. 에효. 휴지뿐만 아니라 일회용품을 쓰면서 드는 죄책감 앞에선 얼른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는 이율배반의 태도. 알면서 안 지키는 것이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