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도 말로는 공동주택이지만 말본연의 의미대로 '주택'인 집에 살려면 여러가지 불편함이 따르고 각별한 관리도 필요하다. 일년에 한번 구청에서 정화조 청소하라고 엽서 날아오면 업체 불러다가 청소해야지, 몇년에 한번은 외벽도 다시 칠하고 옥상방수도 해야지, 망가진 방충망도 갈아야지...
용인 어느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자기네 단지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1년에 한번 주방 팬 청소도 해주고 전화만 걸면 관리실에서 나와 형광등도 갈아준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집에선 물론 그런 일들이 이제 다 내 차지다. 아버지가 집에 사다 쟁여놓으셨던 장수램프 형광등이 다 떨어져 얼마전 마트엘 갔더니 이제 장수램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죄다 중국산 GE 제품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직원에게 왜 국산은 없으냐고 괜히 신경질 부리다 어쩔 수 없이 또 길이별, 종류별로 GE 형광등을 사다 쟁여놓았다. 중국산 형광등은 얼마나 오래 가나 두고봐야지.
암튼 올 봄엔 외벽 칠과 방수를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6년 만에 새로 페인트를 칠했다.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어쩌고 공동부담액을 나누고 내가 주동이 아니었는데도 약간 골치가 아팠다. 아침 8시부터 업자들이 와서 외벽을 긁어대고 칠 작업을 사흘이나 하는 통에, 나는 첫날 커피 타서 내간 것 말고는 한 일도 없이 신경이 곤두섰다. 어휴.
30년도 넘은 오래된 집에 겉만 새로 칠해놓으니 언뜻 꼴사납게 화장발 잔뜩 세워 오히려 주름살이 더 드러난 늙은이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째뜬 깨끗해져 개운한 건 사실이다. 집안 역시 제대로 가꾸자면 도배할 때도 됐고 주방 싱크대도 확 갈아치우고 싶다는 욕심을 품다가 또 결론은 이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 재건축은 아예 물건너갔으니 금세 팔릴 지 모르겠으나, 다시 부동산에 알아봐야겠구나 싶었던 거다. 부동산에 매물 내놓을 때 사진도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어본 바 있어서 충동적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페인트발이 화장발처럼 화사하기를 바랐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조명발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문제일수도;;). 벌써 무성해진 나무 때문인지 무슨 귀곡산장 분위기가 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사진 올리면 오히려 보러 올 사람도 안 올듯. -_-
하지만 생각은 이사에 미쳤으되 부동산에 연락을 하는 순간, 언제 낯선 사람이 온 집안을 헤집고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고 있다. 과연 나는 이 집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하여간 사소한 노력의 일환으로 쓰지 않는 오래 된 그릇을 한 보따리 쓰레기봉지에 담아 버렸고, 앞뒤 베란다 여기저기 뒹굴던 빈 화분들도 큰 자루에 넣어 처분했다. 어찌나 쓰레기 자루가 무거운지 비틀비틀 낑낑대며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 골목 어귀까지 내다놓은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팔과 어깨가 쑤셨을 정도였다. 쓸데없는 오래된 세간살이는 엄마 안 계실 때 몰래몰래 자꾸 처분하라는데, 버리지 못하는 병은 모녀가 똑같으니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나마도 옥상 방수작업은 계속 오는 비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어떤 집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참... 골치아프다. 지금껏 30년 가까이 붙박이로 살 수 있었음이 그저 감사할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