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서 오래된 삼색볼펜을 찾아냈다. 빨간펜이 필요해서 뒤지다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정작 빨간색은 나오지 않았다. 알공달공 더러운 자태로 보아 대체 언제 것인지 알 수 없고, 누가 다 쓴 것을 잘못 넣어두었나 열어보았더니 뜻밖에 심이 모두 새것이다. 왠지 최소한 15년은 넘은 물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정색은 써보니 금세 나왔고, 파란색도 용수철무늬를 서너개 그리고 나니 잉크가 솔솔 잘나왔다. 하지만 빨간색은 며칠째 심심하면 이면지 뒤에다 용수철을 그려대고 있는데도 잘 안나온다. 검정색과 파란색은 흐리게 나오다 이내 진하게 나왔는데, 빨간색은 신기하게도 한참 뒀다 쓰면 진하게 나오다 곧이어 흐려진다. 이유가 뭘까. 원래 빨간펜이 필요했던 일은 하는 수 없이 색연필 심을 가늘게 깎아 대체했기에 꼭 필요가 없는데도 계속 집착하고 있다.
나는 삼색펜을 싫어했다. 회사다닐 때 빨간색과 검정색 모나미 볼펜을 테이프로 묶어 한꺼번에 쓰는 사람도 본 적 있고, 그런 사람들의 수요가 있기에 삼색펜이 출현했겠지만 나는 괜스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뚱뚱한 볼펜자루 모양새부터 싫다고 여겼으나, 비슷한 굵기의 뚱뚱한 만년필은 손에 잡히는 느낌을 좋아했으니 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한꺼번에 다재다능한 느낌, 약삭빠른 쓰임새의 느낌이 싫었던 것 같다. 뭔가 꾸준하고 지긋하지 못하달까. 빨간색, 파란색, 검정색 펜이 다 필요하더라도 나는 굳이 세 자루를 다 갖고 다닐망정, 삼색펜은 체신머리 없다며 쓰지 않았다. 한 가지 색을 쓰다가 다른 색 뒤꼭지를 눌러 심을 집어넣을 때 나는 찰칵 소리도 싫었다. 유독 볼펜똥이 많이 나왔던 것도 같다. 싫어서 안 썼다며 이토록 단점을 많이 알고 있는 건 실제로 꽤나 많이 써봤다는 뜻인가? ㅋㅋ 암튼 어떻게 된 사연으로 내 책상서랍에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니 엄청 대단한 발명품이라 특허도 당연히 받았을 것 같은 물건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다방면에 재주 있는 사람, 멀티플레이어다. 그러니 걸핏하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내가 싫어할만도 하다. 새삼 나는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던 인간인가 싶어져 좀 웃기다. 어쨌든 이제는 멀티플레이어 팔방미인에 대한 시기심보다 존경심을 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삼색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진다. 쓸 일도 없으면서 빨간색도 어떻게든 나오게 하려고 집착하는 시도가 그 마음의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