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질

투덜일기 2012. 1. 26. 17:54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꽤 오래 전부터 나는 빗질을 하지 않는다. 곰곰이 돌이켜 보아도 대체 언제 시작된 습관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보글보글 볶고 나서부터인가?(파마를 하고 나서는 '컬'이 망가지지 않도록 '도끼빗'이라고 하여 빗살이 아주 성긴 거대한 빗을 사용해야 한다고 들었고, 과거 그런 도끼빗이 우리집에도 있었다. 사라진지 오래됐지만;;) 하지만 요샌 줄곧 생머리인데. 암튼 내방엔 아예 납작한 빗(일명 comb)이 없다. 대신에 헤어드라이 할 때 쓰는 둥근 롤브러시와, 일반 브러시가 하나씩 있기는 하다. 그나마 머리를 말릴 때 롤브러시를 앞머리와 옆머리에 대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내리기는 하므로, '빗질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부터 잘못됐다고 지적받을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그 행위는 내게 '빗질'로 여겨지지 않는다. 빗질이라 함은 납작한 빗이든 브러시든 손에 들고서 머리칼 전체를 쓱쓱 빗어내려야하는 거 아닌가? 난 그런 거 안한지 정말 오래됐단 말이지.

차르르 윤기나는 머릿결을 위해서는 열심히 빗질을 해주어야 한다는데, 오래도록 빗질을 생략하고 대충 털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쓱쓱 정돈한 다음 헤어드라이어로 말릴 때도 롤브러시 대신 손가락으로 말거나 빗는 것이 나는 더 편하다. 물론 그 때문인지 머릿결도 엉망이다. 가뜩이나 숱도 적고 얇은 머리칼엔 점점 히마리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나이들면서 죄다 보글보글 아줌마 파마들을 해대는 이유도 생머리로 버틸만큼 숱과 결이 뒷받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이든 친구들이 귀띔을 해준다.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얘. 원래도 숱이 적어 속알머리가 들여다보이던 머리칼은 더욱 부실해졌다. 그렇게 많지도 않은 머리칼이 빠져서 브러시에 마구 끼어있는 걸 빼내는 것도 고역이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도, 브러시에 끼어 엉킨 머리칼도 나는 잘 못보겠다. 좀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머리 길이가 계속 짧은 편이었던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으나(실제로 30대의 대부분은 숏커트로 살았던듯) 최소 10년은 넘게 '제대로' 빗질을 안하고 지냈음을 새삼 깨닫고 보니 스스로도 퍽 신기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럴까? 게으른 나만 그런가? 빗질 안하기를 처음 내게 조언했던 건 분명 미용실이었다. 젖은 머리를 빗으로 빗으면 상하니깐 빗지 말고 수건으로 탁탁 털어 말린 후 손가락으로 슥슥 어루만지며 말리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미용실에서 그런 조언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을까? 물론 나처럼  그말을 십수년째 별 생각 없이 고수하란 법은 없겠지만.

하여간에 머리 길이와 상관없이 빗질 안하는 습관이 뿌리깊게 박힌 나머지, 요즘처럼 머리칼을 마구 방치하여 꽤나 길어지고 나면 이놈의 머리칼이 마구 엉킬 때가 있다. 특히 머리감고 나서 잘 안말린 채 비비고 잠을 잔 뒤엔 어김이 없다. 대개는 빗 대신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넘기면 걸리는 것이 전혀 없는데, 가끔 뒷머리가 쇠수세미 뭉치처럼 바글바글 엉켜있는 거다. -_-; 그러면 또 행여나 소중한 머리칼 빠질세라 끊어질 세라 한올한올 엉킨 실 풀듯 손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오늘도 한참 엉킨 머리칼을 풀고 앉았다가 킬킬 웃었다. 애당초 머리를 참하게 빗어놓았더라면 엉킬 일도 없었을 텐데 참 나. 성격도 이상하여라.

예전에 엄마가 뜨개질 고수였던 시절, 술술 뽑아쓰기 좋게 하느라 털실을 미리 풀어 바구니 같은데 담아놓았는데 동생들이 뒤집어 엎는 바람에 실이 엉키면 엄만 엉킨 실을 푸는 임무를 내게 맡겼다. 아주 드물게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 끊고 다시 실을 이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대개는 내가 기필코 엉킨 실을 다 풀어내고야 말았고 그 성취감을 퍽이나 즐겼던 것 같다. 오늘도 엉킨 머리칼을 한올한올 잡아당겨 죄다 풀어 다시 매끈하게 만들어놓고는 별난인간도 다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번쯤은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즐기는 짜릿한 모험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그렇다고 새삼 내일부터 열심히 빗질을 시작할 위인도 아니고 이 게으름의 끝은 어디일지 그게 나도 궁금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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