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

투덜일기 2011. 11. 15. 03:03

학창시절 해마다 열리는 합창대회가 난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한달도 넘게 방과후에 꼬박 남아 연습하는 게 무엇보다도 제일 싫고, 악보도 잘 못보는 까막눈으로 자칫하면 새로운 노래를 두곡이나(지정곡 하나, 자유곡 하나) 배워야하는 것도 싫고, 합창대회 직전 무대 뒤에서 닭비린내 나는 날달걀을 깨먹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반장이 달걀 두판 사가지고 와서는 목소리 잘 나오게 무조건 먹으라고 무식하게 강요했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달걀 껍질에 살모넬라 균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수년간 매해 날달걀 입대고 억지로 먹고도 다들 멀쩡한 게 참 신기하다. 우웩~).
 
투덜투덜 못마땅해하는 내가 속했던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6년 내리 내가 속한 반은 합창대회에서 상을 타본 적이 없었다. 지휘자랑 반주자는 꽤나 유명하고 훌륭한 애들이었는데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나랑 3년 내리 같은 반이었던 지휘자는 조회 때마다 단상에 올라 애국가랑 교가 지휘도 하고 성악전공도 하는 실력자였는데도 우리반 60명으로는 합창대회 수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악보치이긴 해도 음치박치는 아닌지라 내가 턱 들어봐도 합창 잘하는 반은 확실히 소리가 틀렸다. 화음의 균형이 잡히고 소리도 웅장하달까. 합창대회때 강당에 앉아있어보면 대강 어느 반이 상을 타겠구나 짐작이 가능했다.   

대학때도 잠깐 합창반 동아리에 억지로 끌려다닌 적이 있었는데, 둘째주였나 무려 독일어 가곡을 막 가르치려들어서 얼른 도망쳤다. 고딩때 합창대회 지정곡으로 <들장미>를 독일어로 외워 불러야했던 해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겠나. -_-; 나는 아무래도 협동심이 좀 떨어지는 부류였던 것 같다. 매스게임도 그렇고 단체로 뭘 좀 하라 그러면 왜 그리도 싫던지! (하기야 단체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마는, 그래도 합창대회며 응원대회 같은데서 상타는 반은 꼭 있기 마련;;) 내가 합창을 싫어했기 때문인지, 드물게 합창공연을 보아도 별 감동은 없었다. 그저 연습하기 힘들었겠구나 생각했던가? 그래도 전문합창단 공연은 대개 악보를 보면서 하니까 별로 안 어려울 것도 같았다. 

교생실습을 나가서도 애들 합창대회 준비를 도와봤지만 어휴, 할 게 못됐다. 피아노를 좀 배운 전적이 있든지 해서 악보 보고 대강이나마 음을 잡을 줄 아는 아이들은 반에 절반밖에 안 됐던 거 같다. 한소절 두소절씩 파트별로 노래를 기껏 가르쳐 돌려보냈다가 다음날 연습시켜 보면 다시 원점이고 엉망이었다. ㅋㅋ 하기야 뭐 나도 학생땐 그랬으니까. 다만 교생 입장일 땐 내가 아는 노래여서(6년이나 합창대회를 겪어봤더니 곡이 빤하더군) 참견이 가능했을 뿐. 물론 내가 교생때 맡았던 반도 역시나 합창대회에서 상을 타지 못했다. 나의 징크스였을까? ㅋ

하여간에 억지로 합창대회 준비를 할 때는 그렇게도 싫더니만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과 일반인이 모여 합창단을 꾸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꽤 재미있게 보았다. 우는 사람 보면 덩달아 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한 개개인이 모여 함께 노력해 얻은 성취감이 주는 눈물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대중매체의 힘과 유행 탓도 있겠으나, 암튼 그 프로그램 이후 전국적인 합창붐이 일었다고 들었다. 최근엔 시즌2로 실버합창단 프로그램도 방영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고운 목소리로 합창단에 지원한 할머니를 TV로 보며 자극을 받으셨는지 울 엄마도 지난달부터 동네 문화센터인지하는데서 운영하는 노인합창단에 가입해 열공중이시다. 문제는 울 엄니가 박치라는 것. +_+ 소일거리 삼아 그냥 놀러 다니면 딱 좋겠구만 다음달에 공연이 있어 두곡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는데, 노인들이 일주일에 한번 연습으로 과연 그게 가능할지 나로선 심히 의문이다. 울엄마만 해도 수요일마다 합창연습 하고 돌아온 날은 그럭저럭 악보를 보며 노래를 하시는데, 바로 다음날만 되도 전혀 다른 가락이 흘러나온다. 듣고 있자면 웃겨서 미치겠다! 완전 민폐일 것 같아 걱정했더니, 같이 다니는 이웃 한분은 아예 콩나물대가리 구분도 못하신다고 자기는 우등생축에 든단다. +_+

요즘 엄마가 매일 악보를 보며 열공중인 노래는 <그대 있는 곳까지>(나는 <에레스뚜>로 배웠던 노래). 다행히 내가 아는 노래라서 2주째 매일 개인교습(?)을 시켜드리고 있는데, 음은 이제 얼추 다 잡아드렸으나 아직도 박자가 대단히 어설프다. '...그대목소리~ 아~모두...' 부분이 전혀 안된다. 이후 반복되는 '... 있을까~ 아~ 바람아..' 부분도 마찬가지. ㅠ.ㅠ 하도 매일 이 노래를 불렀더니 나도 모르게 아무때나 흥얼흥얼 아주 입에 붙어버렸다. 물론 왕비마마께서는 TV보다 말고도 척 악보를 펼치고 연습을 하실 정도다. 그러고도 음정박자는 여전히 불안불안.

하지만 엄마의 합창연습을 보며 막상 당시엔 몰랐다가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가치를 또 한번 깨닫는다. 학창시절엔 참 지겹고 싫기만 했었는데 왜 해마다 교내합창대회를 강행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억지로라도 여럿이서 입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는 것의 의미 외에도, 그때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그런 합창곡들을 끝까지 외웠겠으며 날달걀 톡톡 깨먹는 법을 배웠겠나. 콩나물대가리에 서툰 내가 불안하게 외워 익힌 음정을 한달쯤 연습 후 자신있게 소리낼 수 있게 된 과정도 다 내겐 피가 되고 살이 되었겠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해서 엄마의 합창연습을 열심히 도울 생각이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 맹세~♩♪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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