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투덜일기 2011. 12. 6. 23:12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학예회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느라 칠한 검정색 아이라인과 빨간 립스틱이 아마도 처음 내가 해본 화장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 화장대에서 더러 화장놀이를 해봤다는데, 울 엄마의 유일한 화장도구는 '주홍색' 립스틱이었기 때문에 나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얼굴 새하얀 엄마에겐 잘 어울릴지 몰라도(더는 얼굴색이 하얗지 않은 노년의 울 엄마는 여전히 '주홍색' 립스틱을 가장 선호하신다. 참 취향도 일관성 있으시지;;) 내가 바르면 그야말로 '김치국물' 묻은 것으로 보일 게 뻔했다.

그 뒤로 중학생 때는 언감생심 화장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고등학생이 되자 반에서 외모에 유달리 신경을 쓰는 몇명은 체리빛깔의 립글로스를 바르고 다녔다. 똑같은 체리향이 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바르는 챕스틱 립크림과 달리 그애들이 바르는 건 향이 더욱 진하고 반짝반짝 입술에 윤기가 흘렀으며 색도 또렸했다. 물론 학생부 금지품목이었지만, 당시에 향수도 어지간히 뿌리고 다니던 친구 하나는 학생주임한테 가끔씩 립글로스 때문에 손바닥을 맞고 반성문을 써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개기름 바른 것 같다>며 그런 아이들의 요란한 입술을 비웃는 축이었다. 진짜로 안 예쁘고 입술만 동동 떠다니는 것 같던데!

그러고는 드디어 고3 말, 학력고사(그렇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 ㅋㅋ)가 끝나자 연일 화장품 회사에서 찾아와 특별수업을 진행했다. 아이섀도와 립글로스, 립스틱 샘플도 막 나눠주면서... 그러나 80년대 중반인 당시엔 파격적인 색조화장이 유행이라(분홍 바탕에 파란색으로 눈꺼풀 강조, 주황바탕에 진초록 따위!) 화장품 회사 직원이 예쁜 아이 하나를 모델로 뽑아 색조화장을 해놓은 몰골은 예뻐진 게 아니라... 퍽 무서웠다. +_+ 나는 결심했다. 졸업해도 화장하지 말아야겠다고.

대학 신입생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에 <지지>라는 화장품 브랜드가 엄청 유행을 했다. 사회 초년생들에 맞는 가벼운 색조와 저렴한 가격, 앙증맞은 케이스로 관심을 끌었다. 내가 직접 샀는지 누가 선물을 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5월 축제를 앞두고 드디어 내 손에도 그 <지지 립글로스>가 손에 들어왔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둥근 세모꼴의 분홍색 케이스가 지금도 눈에 선한데 암튼, 최초의 화장이랍시고 그걸 입술에 펴바르고 학교에 갔더니 촌스러운 과 남자애들이 막 아유를 보냈다. 초등학생이 엄마 꺼 훔쳐바른 것 같다 야! 갈치 한마리 입에 물었냐? 그러거나 말거나 그 이후로 나의 색조 화장품은 야금야금 늘어났다. 밤색과 검정색 아이라이너, 눈썹 연필, 매니큐어, 색색깔의 아이섀도까지.

그래도 학생시절엔 매일 화장을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시간 많고 기분 내키는 날 그림 그리듯 시도해봤다가 외출 직전에 북북 지우고는 아이라이너와 립글로스 정도만 내버려뒀던 것 같다. 본격적인 화장은 역시나 회사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단은 <내 얼굴의 햇살>이라고 불리던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껴야 했는데(얼굴을 반쯤 가리는 당시 유행 안경을 쓴 여직원은 잘 안뽑아주던 전근대적인 시대여서 입사원서용 사진부터 안경을 벗고 찍었다. ㅠ.ㅠ), 안경을 벗고 보니 부은 듯 수북한 눈두덩이 어찌나 더 눈에 거슬리던지! 그걸 감춰보겠다고 아이섀도로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것. 

암튼 첫 직장이 의류관련업이었고, 그 회사 모토가 <패션을 모르면 패션을 다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어서 옷이며 화장 가지고 꽤나 스트레스를 줬다. 해서... 옷이야 뭐 그렇다 치고 당시 사진을 보면 화장이 아주 가관이다. 눈주변은 뻘겋고 퍼렇고 때론 밤탱이처럼 시커멓고 입술은 새빨갛지 않으면 시커멓고(왜 그땐 진한 갈색 립스틱이 또 그리도 유행이었는지!)... 게다가 미국본사를 등에 업고 우리가 갑 입장이라 구매자로서 '센' 이미지를 줘야 한다고 선배들에게 교육을 받기도 했다. 끙. 암튼 그래서 앨범에선 그때 사진들이 바로 나의 암흑기다. 닭벼슬처럼 앞머리를 치켜세운 꼬불꼬불한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고 얼굴은 독기 어린 화장에다 울트라파워숄더 재킷까지. ㅋㅋㅋ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화장의 유행도 변하고 나이를 먹으며, 이제는 화장이랍시고 얼굴에 공들여 색을 입히는 일이 거의 연중행사가 되었다. 물론 대개 외출할 때는 선블럭과 비비크림 정도야 바르지만, 이젠 귀찮아서 장보러 갈 때나 심지어 보호자로 엄니 병원 따라갈 때조차 미친 척 맨얼굴로 나가도 그리 민망하지 않은 뻔뻔함을 갖추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민낯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화장 지우기 귀찮아서다 ㅎㅎ) 민낯이 민망하면서도 귀찮음을 못이기고 그냥 집밖으로 나설 땐, 어쩔 수 없이 아줌마 다 됐구나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 화장에 요란과 부지런을 떠는 모습도 상상되지 않는다.

세대차겠지만 우리때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화장을 정말 일찍 시작하는 추세다. 요즘 열네살 조카의 (인위적으로) 뽀얀 얼굴에 놀란 내가 걱정을 했더니 비슷한 또래의 딸 키우는 친구가 별난 일도 아니라고 위로해주었다. 열네살 중학생이면 비비크림과 파우더, 아이라인은 기본이라고 봐야 한다나. +_+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그 친구는 지켜보니 6학년 여자애들도 거의 절반은 파우더를 두드리고 다니더라고 했다. 미디어와 사회의 부추김 때문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더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은 이제 아이들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구 말이, 고등학생인 큰딸은 차라리 지각을 했으면 했지 눈썹이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아예 집을 나서질 않는단다. 그래서 친구는 고3이 되기 전에 차라리 딸에게 살짝 눈썹 문신을 해줄까 심각히 고민중이라고 했다. 참고로 친구 딸은 고교평준화가 되지 않은 수도권 지역의 유명 학교 우등생이다. 하기야 미모에 대한 관심과 성적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나. 개인차겠지.

그래도 여전히 나는 청소년기의 색조 화장이 걱정스럽고 마뜩찮다. 화장 안해도 눈부시게 예쁘다고, 네 나이 땐 여드름 송송난 이마도 매력이라고 아양도 떨어보고, 지금부터 화장 너무 하면 스무살 즈음엔 피부나이 서른살로 판명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협박도 해보지만 별 소용은 없다. 돌아보면 화장에 대해서 이미 어른들이 너무 많은 빌미를 조카에게 제공했던 것 같다. 일종의 색채 수업일 수도 있겠다 여겨, 어린이용 장난감 화장품도 꽤 많이 사주었고(요즘 문제되는 유독성 화학제품은 아니었기를 빌고 있다 ㅠ.ㅠ), 어린 시절 미용실에서 장시간 버티며 까탈부릴까봐서 원장이 조카에게 예쁘게 화장을 해준 적도 많았다. 조카가 워낙 그런 걸 좋아라했었고...


예닐곱살 땐 가끔씩 어른들이 신나서 해주었던 색조 화장이 열네살 땐 '절대' 안된다고 말하는 논리는 내가 들어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다만 '학칙'에 어긋난다는 점이 문제인데, 요즘 아이들이 그걸 중시할 리도 없지 않은가. 색조화장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비비크림과 아이라인 정도이니, 그저 화장은 잘 지우는 게 중요하다고 당부하며, '요즘 열네살 다 그렇대'라고 마음을 달래고 있다. 가뜩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같은 사춘기 광풍 가운데 사실 화장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니 그냥 넘어간다고나 할까. 귀엽고 어여쁜 조카들이 더는 자라지 않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은 게 바로 얼마전인데, 간사하게도 지금은 사춘기가 후딱 지나버려 어서 성숙해지면 좋겠다고 빌고 있다. 그러면 사춘기의 말간 맨얼굴이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걸 녀석도 뒤늦게 깨닫게 될까. ㅡ.ㅡ;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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