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갈게

투덜일기 2011. 10. 4. 21:07

어제 다니러온 큰동생네가 밤늦게 돌아갈 때의 일이다. 늘 하던대로, 동생은 계단을 내려가며 위쪽 현관에 서 있는 울 엄마에게 또 한번 인사를 했다. 엄마, 갈게.

그랬더니 아홉살 지환이가 대뜸 호통을 쳤다. 아빠는 내가 나중에 커서 인사할 때 '아빠, 갈게!'라고 하면 좋겠어? 급 당황해 말문이 막힌 동생을 본 내가 킥킥 웃으며 거들었다. 그럼, 그럼! 엄마, 안녕히 계세요, 이렇게 인사해야지. 그치?

ㅋㅋㅋ 사십줄에 들어선지 오래인데도 부모님께 존댓말이 서툰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엄마,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을 연습하고 자주 써먹겠노라고 언젠가 포스팅을 하기도 했지만 그야 결심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선 "엄마!"라고 부르면 끝인 경우가 잦다. 기껏 높여봐야, "엄마 저녁 드셔". (오늘 저녁에도 이렇게 말한 듯;;)

밖에 나가선 그래도 제법 예의바른 언어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안에서 나의 형제들이 부모님 존대를 엄중히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부모님 두분이 서로 반말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겨우 한살 차이인데다가, 학년상으로는 같은 동네 친구로 연애를 시작해 8년만에 결혼했으니 두분이 평생 반말을 쓰고 산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해서 부모님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냥 워낙 막역하고 정이 깊은 부부사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가족인 경우 반말이 곧 상스럽고 예의 없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친근함의 차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친할머니께도 오래도록 반말을 했었다. 할아버지랑 외할머니한테는 당연히 존댓말을 쓰면서도 친할머니한테는 존댓말을 쓰는 게 오히려 어색했다. 가끔 할머니께 반말하다 할아버지한테 걸리면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제버릇 남주나... (그렇다고 밖에 나가 낯선 어르신에게 함부로 반말짓거리 해대는 사람들은 싫다. 그건 몰예의, 몰상식한 거고!)

밖에서 보면 버르장머리없는 집안 내력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는데, 중학생이 된 정민이도 제 할머니한테 아주 편히 반말을 한다. 할머니가 용돈을 주면 옆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들릴락말락 '고맙습니다'라고 따라하는 적이 간혹 있지만 노상 반말 쓰다 갑자기 존댓말이 나올리 없지 않은가? 옆에서 제 엄마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라 종용해도, 고집스런 정민이의 대답은 '잘 쓸게, 할머니'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외출할 때 나 역시 지금도 '엄마, 갔다올게'라고 하는 판국에 감히 누굴 탓하랴.

반면에 사내 조카녀석들은 존댓말을 꽤나 유연하고 자연스레 쓰고 있는 듯하다. 만만한 고모한테는 당연히 반말을 써도 할머니한테는 차마 못그러겠다는 듯이. 그게 대단히 기특하고 장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말의 길이만큼 할머니와의 사이도 약간은 멀어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예절바른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면서도, 나는 더 자글자글 늙은 후에도 녀석들에게 '고모, 안녕히 계세요'보다는 '고모, 갈게!' 또는 '고모, 안녕~!"이라는 인사를 듣고 싶다. 내가 좀 이상한 건가? ㅎ 나도 자타공인 할머니 나이가 되면 마음이 달라지려나?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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