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박김치

식탐보고서 2011. 6. 15. 18:22

밥순이로 살더라도 몹시 수고롭고 골치 아픈 김치는 웬만하면 담가먹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결심이나, 예외는 간혹 있다. 지난번엔 식탐 열망을 이기지 못해 오이김치를 두번이나 만들어 먹었고(첫번째가 너무도 맛있어 열흘쯤 뒤엔 더 다량의 오이를 사다가 만들었다 실패하는 바람에 다시는 시도 안하고 있기는 하다;), 제사나 차례를 앞두고 나박김치는 내가 담그지 않으면 안되는 품목이 되고 말았다. 설날 때는 수정과라도 올리니까 제기 중에서 국물 담는 그릇을 하나라도 쓸 수 있는데, 여름엔 나박김치가 없으면 네 개나 되는 우묵한 제기를 전혀 쓰지 못하는 게 좀 민망하다. 누구보다도 나박김치를 좋아하셨던 할머니 제사땐 꼭 올리려고 했었는데 여름이었던 할머니 제사를 겨울 할아버지 제사로 합치고 보니, 이젠 제사 핑계로 담근 나박김치에 국수를 말아먹으려면 아버지 기일과 추석에 맞춰 담그는 수밖에 없다.

대충요리의 선구자로서 대충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내 그간 어깨 너머로 배운 아이디어까지 더하여 대강 뚝딱 만들고 나면 이상하게도 첫 솜씨가 제일 훌륭하다. 나박김치도 몇해 전 처음 만들었을 때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의 나박김치보다는 무와 배추를 조금 작게 썰어, 엄마에겐 소꿉장난 하느냐는 일갈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할머니표 나박김치인 것을 어쩌랴. 말년에 이가 부실해지신 데다 허리까지 굽어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이 쉽지 않았던 할머니는 나박김치의 무와 배추도 앙증맞을 만큼 작게 썰어 만드셨고, 매 끼니마다 나박김치를 한 탕기씩 해치우셨다. 그런데 나도 그 편이 먹기도 좋고 보기에도 예쁘고 맛있었던 기억이 있으니 그대로 따랐던 거다. 또 다시 일년만에 나박김치를 담그느라 어제 몇시간 서 있었더니 종아리에 알이 배겼는데, 깜박깜박하는 나의 기억력으로 볼 때 어딘가 적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재료를 또 하나 빠뜨릴 것 같아 기록해두기로 했다. 어제는 글쎄 장 볼 때 배를 빠뜨리는 바람에 다 저녁때 나가서 사와야 했다. 나박김치엔 뭐니뭐니 해도 배를 넣어야 국물이 시원해지는 법이거늘.

재료: 무 반 개, 쌈용 배추 한 통, 큼지막한 배 한 개, 쪽파 한 움큼, 미나리 한 움큼, 통마늘, 홍고추, 고춧가루, 천일염, 찹쌀가루, 흰설탕, 멸치액젓 한숟가락.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으로 딱 하나 분량임)

1. 찹쌀가루를 두 숟가락 정도 물에 개어 묽게 찹쌀풀을 쑤어 놓는다. 
2. 무를 1.2~1.5cm 두께로 토막내서 정사각형 모양으로 납작납작 잘라 소금을 뿌려 절인다.
3. 나박김치에 들어가는 배추는 노란 속잎만 넣는 게 맛있으므로 나는 아예 쌈용 배추 속고갱이만 사서 넣는다. 배추 역시 무와 비슷한 크기로 잘라 슬쩍 소금에 절인다.
4. 쪽파와 미나리를 다음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적당한 길이로(나는 2.5cm)로 잘라둔다.
5. 홍고추는 절반 갈라 씨를 거의 다 빼낸다.
6. 절인 무와 배추를 물에 씻어 건져 물기를 뺀다.
7. 배 껍질을 깎아 무와 같은 크기로, 대신에 좀 더 도톰하게 잘라놓는다.
8. 통마늘을 저며 채썰어놓는다.
9. 찹쌀풀에 소금, 멸치액젓, 설탕, 생수 약간을 넣어 잘 저어 풀어놓는다. 
10. 김치통에 미나리를 뺀 모든 재료를 다 넣고 양념을 부은 다음 생수를 넉넉히 부어 천일염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을 아예 넣지 않는 집도 있다지만 나는 역시나 할머니 식으로 백설탕을 약간 넣는다. 그래야 나중에 소면 삶아 말아먹을 때도 환상적인 맛이 난다. ^^;
11. 고춧가루를 원래 베 보자기에 싸서 국물에 담가 지저분해지지 않게 발그레한 색을 거라는데 나는 나중에 베 보자기 빠는 게 귀찮아서 -_-; 멸치 다시 국물내는 거름망에 고춧가루를 넣고 그걸 김치통에 담근다. ^^v  가는 고춧가루는 빠져나가지만 뭐 그래도 거의 똑같은 효과가 나므로 흡족하다.  
12. 날씨에 따라서 하루나 이틀 정도 상온에서 익힌 다음에 미나리는 맨 마지막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한다. (미나리를 처음부터 넣으면 뭔가 맛이 없어지고 빨리 신다고 할머니한테 들은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나박김치가 맛있을지 궁금하다.

아직 미나리는 넣기 전이다. 새콤하니 익은 냄새가 나긴 하는데 좀 덜 익었다. 오늘 밤중이나 내일 새벽에 냉장고에 넣으면 될듯.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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