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은 상당부분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외과 수술에 로봇을 도입한다든지 내시경으로 비절제 수술의 범위를 확대한다든지 암이나 에이즈 같은 난치병에 획기적인 약물이 개발된다든지 하는 경우는 있어도 오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정신과 두뇌에 관해서는 의술에 크게 변한 점이 없는 모양이다. 요번에 왕비마마의 진단과정을 지켜보며 새삼 놀라고 우스워서 진즉 포스팅감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환자와 의사가 따로 상담실에 가서 주고받아야 할 대화인데,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 병실에서 대신 문진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보호자인 나도 지켜볼 수 있었다. 정신과 진단은 예나 지금이나 접근방법이 동일하다는 것을. ㅋㅋ 날짜를 묻고, 전현직 대통령을 묻고, 여기가 어딘지, 자기가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보는 양상이 어쩜 하나도 안 변했는지! 정말이지 소설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 이웃들도 비교해 보시라고, 인용문을 옮겨놓는다. 40년이나 세월이 흘렀어도, 나라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신과 진단 이대로 좋은 거니까 계속 되는 것이겠지? 암튼 나는 웃겼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할당된 5분 동안 대통령 이름과 날짜, 왜 병원에 왔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는 100부터 거꾸로 7을 뺀 숫자를 말하라고 했다.
거꾸로 숫자 셈하기는 코니에게 골칫거리였다. 텍사스에서 시카고로 전학을 가면서 그녀는 산수 수업을 일부분 듣지 못했다. 잔돈을 받으면 꼭 세어보았고 계산원에게 무슨 속셈인지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전하느라 손바닥에 놓인 잔돈을 째려보곤 했지만, 그녀는 팁을 제대로 계산하거나 슈퍼마켓에서 잔돈을 속이는 계산원을 붙잡아본 적이 없었다. 어디 한번 해볼까, 100, 93, 86, 79, 72……. 더럭 공포가 그녀를 뒤흔들었다. 70 아닌가? 또 틀렸군. 7 곱하기 10은 70이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 틀렸어…….
-- p252,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2
열악하기 짝이 없는 70년대 미국의 주립 정신병원에 가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물론 여자의 정신은 말짱하지만 의료진은 정신분열로 진단하고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까지 자행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절대로 저런 정신병동에 가면 안되겠군 했었다. 근데 100에서 7을 거꾸로 빼는 셈을 요즘도 환자에게 시킬 줄이야!
“페니웰 씨, 어디에 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도통 어딘지 모르겠어요.”
리엄이 말했다.
“그럼 날짜는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난 방금 깨어났어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하시는군요.”
(중략)
“물론 옳으신 말씀입니다, 페니웰 씨. 그럼 대통령은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지요.”
리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에요. 나는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p20-21, <노아의 나침반>
역시나 배경은 미국. 정신병원은 아니고, 강도의 침입으로 뇌진탕을 입은 노인에게 병원에서 하는 의사의 질문이다. 메디컬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대체 정신 혼미한 환자에게 대통령은 왜 물어보는 걸까? 입에 올리기도 싫은 이름, 나 같아도 대답하기 싫겠다. -_-;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병원이요."
"무슨 병원이요?"
"***스 병원."
"저는 누구죠?"
"의사 선생님이요."
"오늘 며칠인지 아세요?"
"3월 3일."
"몇년도죠?"
"2010년"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 누군지 아세요?"
"이명박. 아 참, 2010년 아니고 2011년이다. 해 바뀐지가 언젠데 아직도 만날 헷갈려요, 호호호."
"그 전엔 대통령이 누구였죠?"
"............................ 아유, 이름이 생각 안나네. 그 사람 있잖아요. 자살한 사람. 아 맞다, 노태우."
(왕비마마는 원래도 늘 노무현과 노태우를 혼동해 이야기한다.)
"그 이전 대통령은요?"
"............................. 얼굴은 바로 생각 나는데, 이름이 뭐더라... 그 사람도 죽었잖아요. 다리 절룩거리는 사람."
"네, 됐습니다. 그럼 그 이전 대통령은요?"
(이쯤 되니 지켜보던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나라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랬더니만 통쾌한 왕비마마의 대답.)
"내가 정치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잘 모르겠네."
멀찍이 병실 구석에 앉아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나는 위 두 소설의 장면이 떠올라 속으로 큭큭 웃었다. 왕비마마가 이명박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현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자기 손으로 뽑아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 대통령들은 다 몹쓸 인물이라 여겼으니 우호적으로 기억을 해줄 리가 있나. 저 정도 기억해준 것도 감지덕지.
저 대화 이후로는 100에서 7을 빼보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속으로 식겁했던 나와 달리 왕비마마는 상당히 재치있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93에서 7을 빼는 게 힘든지 90이라고 괜히 바꾸더니 83에서 다시 7을 빼 76이라고 대답하는 식으로. 암튼 여러모로 소설 주인공 감인 우리 왕비마마. 내가 재주 있으면 재미나게 한편 쓸 텐데 안타깝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