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투덜일기 2011. 3. 1. 04:03

오늘은 밤참으로 무얼 먹을까 궁리하다 일주일쯤 전에 사다둔 고구마에 생각이 미쳤다. 두 개만 전자렌지에 쪄먹어야지 하며 꺼내려는데 곰팡내가 훅 끼쳤다. 봉지 맨아래 고구마 하나가 썩어가고 있었던 것. 안되겠다 싶어 고구마 한 봉지를 몽땅 찜통에 쪄놓기로 했다. 과일이든 고구마든 하나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면 주변 것들까지 금세 덩달아 상하는 법이다. 곰팡난 고구마를 3분의 2 이상 잘라내 성한 부분만 남기고 나자 다행스럽게도 다른 고구마들은 다 멀쩡했다. 밤참으로 며칠 내리 토스트를 먹다가 문득 고구마가 생각난 건 혹시 고구마들이 나에게 보낸 텔레파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게 딱 하나만 심하게 썩었다.

커다란 찜기 위를 거의 다 채울 만큼 많은 고구마를 한꺼번에 쪄셔 계획대로 두개만 냠냠쩝쩝 먹고 나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썩어가는 모든 것들도 이렇게 일부만 싹둑 잘라 익혀 부패를 미리 중단시킬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명력을 지닌 모든 것들은 결국 생을 마감하며 부패하기 마련이지만, 찐고구마도 계속 오래 내버려두면 또 상하겠지만,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날 고구마들이 연달아 썩어가 결국 다 버려야할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나 말이다. 누군가는 단지 부패의 속도만 지연시켰을 뿐이라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허나 그건 찐고구마의 효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장 먹을 건 냉장고에 보관하고 남은 건 냉동실에 넣었다가 아이스크림 먹듯 베어물어도 그만이고, 귀찮음을 극복할 수 있다면 납작하게 썰어 말려 쫀득쫀득한 간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 통영에선가는 그렇게 말린 찐고구마로 빼때기죽도 만든다던데. 그러니까 이 미친 썩은 세상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들을 싹둑 잘라버리고 난 뒤에 원래의 달콤한 맛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있었으면, 누군가 그런 묘안을 생각해낸다면 참말 좋겠다는, 찐고구마 옆구리 찌르는 것 같은 이야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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