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의 수난

투덜일기 2011. 2. 21. 02:54
파랑이네 가족이 파랑이만 남겨두고서 9박10일간 여행을 떠났다. 그럴 때마다 파랑이를 기꺼이 도맡아주는 사람은 유명한 애견인이신 나의 막내고모인데, 주말까지 녀석을 맡을 사정이 되지 않아 일요일 오후부터나 파랑이를 맡아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옵션은 두 가지. 그나마 얼굴을 익혀 친해진 우리집에서 파랑이를 이틀 데리고 있다가 고모네 집에 데려다주는 것. 그게 아니면 파랑이가 겁을 내든 말든 동물병원에 이틀 맡겼다가 역시나 고모네 집으로 데려가는 것. 두 경우 모두 파랑이 픽업은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금요일에 나는 외출할 약속이 있었고 밤열두시에나 들어올 예정이었다. 혹 파랑이를 우리집에 둔다면 처음이라 사방에 영역표시 하느라고 질질 싸댈 똥오줌을 왕비마마가 치우셔야 한다는 얘긴데, 나의 개혐오증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므로 그런 일을 왕비마마가 해봤을 리도 없고 잘 해내실 리도 없었다. 물론 나 역시 그런 개수발엔 영 자신이 없었다. 다만 파랑이가 낯선 동물병원에서 이틀밤을 보내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심난해할지 그건 좀 걱정스러웠지만, 나 역시 동물병원엘 맡기는 게 최선이라는 데 동의했다. 어차피 병걸린 강아지들은 입원도 시키잖아, 라고 위로하면서. 물론 애견인인 막내고모는 절대로 동물병원에 보내지 말라고, 병에 걸려올지도 모르고 파랑이가 '트라우마'를 겪게 될 거라며 결사반대하는 쪽이었다. 나도 왕비마마도 마음이 약해져 그럼 그냥 죽이되든 밥이 되든, 아니 개판이 되든말든 집에 파랑이를 데려다놓을까 마음이 흔들려, "그럼 그냥 이틀만 우리가 한번 데리고 있어 볼게..."라고 '자신없이' 말했다. -_-;
 
그런 태도에 선뜻 파랑이를 맡길 순 없었을 거라는 거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결국 파랑이는 난생 처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암튼 새 주인과 산 이후 처음으로 동물병원에서 이틀밤(개주인이 토요일 아침에 출국했으니 하룻밤일 수도 있음)을 보내게 됐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 오후,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파랑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인 사과를 한 조각 잘라 은박지에 싸들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솔직히 동물병원에 들어가본 것도 처음이었는데, 옛날 대한극장으로 영화 보러 다닐 때 밖에서 보이는 애견가게 우리 안에 든 강아지들처럼 파랑이도 그런 요람 같은 데 들어있을 줄 알았더니 나의 착각이었다. -_-;

병원 2층으로 올라가니 얼핏 보기엔 닭장 같기도 하고 개들의 독방 감옥 같기도 한 케이지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그 안에 강아지들이 한마리씩 갇혀 있었다. 예방접종의 차이나 질병의 가능성 때문에라도 당연히 한마리씩 격리수용(?)하는 것이 원칙일 것 같기는 했다. 어쨌거나 좀 크기가 넉넉한 독방 마다 이름표를 매달고 있는 첫번째 방에는 파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문을 하나 열고 들어간 또 다른 방엔 아 글쎄 이름표가 안 달려 있지 않은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안면인식장애로 여러 번 본 사람 얼굴도 잘 몰라보는데 다 똑같이 생긴 말티즈 중에서 파랑이를 어떻게 알아본담! 나는 담당 직원이 당연히 적어둔 파일 같은 걸 찾아보고 개를 인계할 줄 알았더니만, 나더러 찾으란다. ㅠ.ㅠ

다행스럽게도 당황한 내가 방안을 훑어보다가 하얀 개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파랑이 같아 보였다. 내가 파랑아~! 하고 부르니까 녀석도 철창을 마구 긁어댔고, 직원은 얼른 녀석을 꺼내 나에게 안겼다. 헌데 내 품에 안긴 파랑이가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놀러갈 때마다 친한 척 했던 건 다 거짓이었는지, 계속 불안하게 발발 떨면서 품을 벗어나려고 하질 않나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병원 직원은 애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낯설음과 불안감의 표현일 뿐이었다. 주인님들은 어디가고 대체 이사람은 뭔가? 날 또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가?

그때까지만 해도 얘가 정말 파랑이가 맞는지 나 역시 불안했다. 엉뚱한 개를 데려가서 두 집에 혼란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 상상하게 된 거다. 어쨌거나 녀석이 하도 불안해 하니 얼른 차로 데려와서 잘라간 사과를 먹여주었다. 아그작아그작 사각거리는 사과를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녀석이 파랑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파랑이네 식구들도 파랑이가 사과 먹을 때 제일 예뻐할 정도로, 아삭거리는 사과를 씹는 자태가 귀엽기 때문이다. 

사과로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막내고모 댁까지 가는 40여분간, 파랑이는 계속해서 극도로 불안해하며 조수석에서 덜덜 떨었고 운전하는 내 팔을 자꾸만 툭툭치며 쓰다듬어달라고 요구했다. 나를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긴 하지만 일말의 믿음은 있는 모양이었다. 사흘전만 해도 깨끗하게 목욕해서 뽀얀 자태를 자랑하던 녀석이었건만, 케이지에 갇혀서 오줌을 사방에 지렸는지 꼬리와 배, 다리엔 누런 오줌이 묻어 말라뭍어 냄새도 퀴퀴했고 케이지 안이 더러웠는지 전체적으로 꼬질꼬질했다. 내가 그런 더러운  녀석한테 한 팔을 아예 내주고 왼손으로만 운전을 하다니... 역사에 남을 일이었지만, 녀석에 대한 미안함이 더러움에 대한 거부감을 이겼다.

고모댁에 도착할 무렵엔 내 가방을 둥지삼아 드디어 떨기를 멈추고 엎드려 안정세에 점어든 파랑이는, 원래도 자주 가본 곳이고 워낙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인 막내고모를 만나 집안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제 세상을 만난듯 뛰어다녔다. 제 침대와 쿠션, 담요까지 모조리 옮겨다 주었으니 안심할 만도 했다. 그래도 불안한지 오후면 노상 꾸벅꾸벅 졸거나 코를 골며 자던 녀석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엔 내가 벗어놓은 옷위에 달랑 올라가 잠을 청하더니 걸핏하면 깨어나 내 손밑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막내고모 옆으로 가 온기를 나눴다.

파랑이의 크리스마스빔(?) 차림

저녁까지 있다가 다시 녀석을 떼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해봤더니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막내고모를 졸졸졸 쫓아다니는 중이란다. 막내고모가 지난 여름엔 일주일 내내 계속 함께 데리고 다녔다는데(심지어 치과에 갈 때조차!) 요번엔 전시회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더 남은 여드레 동안 사나흘은 또 녀석 혼자 두고 나가야한단다. 과연 파랑이는 애견인이고 완전 낯설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인의 집은 아닌 곳에서 홀로 밤중까지 견디는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까. (그렇게 걱정되면 데려다 놓으시지!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지만 나는 정말로 자신없다니까!) 파랑이 주인들에게는 아무 염려말고 여행이나 즐기다 오라고 했어도 은근히 걱정스럽긴 하다. 요번에 받은 스트레스로 나중에 주인들한테 복수한답시고 막 대소변 실수하면 어쩌나. -_-; 이사하면서 가까스로 쫓겨날 위기를 넘긴 녀석인데 과연. 모든 강아지를 상전 모시듯 하는 막내고모의 각별한 애정으로 하루 이틀밤의 충격쯤은 말끔히 치유될 수도 있기를 빌 뿐이다. 지난번 아파트 단지에서 무작정 달아나는 바람에 한번 잃어버려 이틀인가 사흘 만에 찾은 적도 있으니 주인과의 인연은 꽤 진한 편이라고 치고, 부디 파랑이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이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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