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대

투덜일기 2011. 2. 17. 03:24

거의 일년만에 경기 남부에 사는 친구와 중간지점이라고 여겨지는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둘 다 과거 강남, 역삼, 삼성, 선릉 일대로 출퇴근을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과거일뿐, 친구도 나도 강남쪽에선 똑같이 '촌년'이 된지 오래라 만날 장소 때문에 고민을 좀 했다. 내가 아는 강남역의 주요 지점은 전철역과 교보타워, 그리고 늘 그 친구와 만나던 빵집이다. 그 일대엔 콩다방, 별다방이 하도 많아서 자칫하면 서로 엉뚱한 곳에서 기다릴 수 있으므로, 문자를 한참 주고받은 끝에 어쩔 수 없다며 결론을 내렸다. "태극당인가 고려당인가 하는 그 빵집 있잖니. 그냥 거기서 열두시에 보자."

약속시간 10분전, 나는 아직도 버스 안에 있는데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 그새 그 빵집 없어졌나봐. 전철역에서 교보타워까지 거의 다 올라왔는데 안보여. 파고다 학원 건물에 있지 않았어?" 파고다 학원 건물이 어딘지도 난 모른다. 그치만 이상했다. 지난 여름인가 가을에도 거기에서 누군가를 만났었는데, 그새 없어졌다고? 하기야 요즘엔 어디나 상권이 확확 바뀌니까. 결국 친구는 중앙버스차선 정류장 부근의 어느 도넛 가게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우린 별 문제없이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무엇보다 중요한 수다를 장시간 떨었다.

그러고 나서 친구를 바래다주려고 전철역쪽으로 걸어가며 우린 진짜로 그 빵집--태극당인지 고려당인지 확실하지 않은--이 없어졌나 확인을 했다. 물론 빵집은 없어지지 않았고, 생각보다 전철역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그대로 있었다. 문제는 거기가 태극당도 아니고 고려당도 아닌 '뉴욕제과'였다는 사실.

두 여자는 길바닥에서 미친듯이 깔깔대고 웃다가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빵집'이름으로 우리는 태극당이나 고려당이 더 익숙한 구세대라는 걸. '뉴욕제과'는 그러니까 요즘 간판에 알파벳으로 써있는 뚜레주르나 파리바게뜨와 '당'이 붙는 빵집 상호의 중간이라 할 수 있는데도, 우린 그걸 기억 못했던 거다. 사십대 아줌마들의 건망증 때문이랄 수도 있지만, 벌써 몇년째 교보문고 아니면 그 빵집에서 만났으면서 어렵지도 않은 '뉴욕제과'를 뇌리에 새기지 못한 이유가 또 뭐란 말인가. ㅎㅎㅎ

웃음이 그치지를 않아서 눈가를 훔치다 헤어지며 친구는 다음번에도 아마 자기는 또 '뉴욕제과'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 나더러 기억해두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자신이 없어 얼른 아이폰 메모장에 저장을 해뒀다. '강남역 6번출구 앞 뉴욕제과'라고. -_-; 

집에 돌아오면서 난 또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태극당은 어디에 있는 거지? 옛날에 그 앞에서도 친구들과 참 많이 만났던 것 같은데... 버스가 강남을 벗어나 남산을 통과할 무렵 드디어 생각이 떠올랐다. 태극당은 돈암동 성신여대앞에 있는 빵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에 주로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던. 거기도 가본지가 오래라 아직 남아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혹 흔적 없이 사라졌거나 유명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을까. 아직 그대로 있다면 거긴 여전히 '태극당' 상호를 쓰고 있을까.

버스를 갈아타려고 집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국내산' 땅콩을 찾아 길거리 좌판과 마트를 뒤지다 돌아보니, 도로 양옆엔 파리바게뜨, 뚜레주르, 던킨도너츠가 몇걸음 간격으로 자리를 잡았고, 빵이 맛있어서 내가 가끔 이용하는 빵집도 'OOO 베이커리'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옛날 어르신들은 읽지도 못하게 모든 상호는 근사하고 멋지게 외래어와 외국어로 적어야 직성이 풀리는 풍조 속에서 이렇게 나도 구세대로 접어들고 있구나 싶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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