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야 고맙다

투덜일기 2010. 10. 7. 15:49

딸을 둔 부모는 원래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제 겨우 열세살인 조카를 두고 동생과 올케는 공주의 결혼 문제로 벌써부터 고민을 한다. 동생 녀석은 이렇게 정성들여 키운 딸이 아까워서 어떻게 시집 보내느냐고, 남주기 싫어서 그냥 계속 데리고 살겠다는 전형적인 딸바보 아빠의 발언을 최근까지 토로했다. 그러면 올케는 펄쩍 뛴다. 스무살만 되면 독립시키고 싶다나. 그러면서 공주가 나중에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나갈지, 가서 보면 속 터질 것 같아 안보는 게 낫겠다고 구시렁거린다. 내가 보기엔 참 걱정도 팔자다. 지난 금요일 결혼식에선 벌써부터 딸 예식 걱정을 하질 않나...

딸들의 경우 자라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게 발전하다 어느 시점에 확고한 자리를 잡는 듯하다. 처음엔 멋모르고 제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하다가 유치원쯤 들어가면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사내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려선 엄마랑 결혼하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족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여자친구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가.) 아이들의 그런 대답은 사실 어느 정도 어른들이 강요한 것이다. "너 커서 누구랑 결혼할래?"라고 자꾸 물으니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입에 올리는 게 아닐까.

어쨌든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던 듯한데, '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론적인 정신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독신을 부르짖지는 않았어도 내심 난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으리라고 '자연스레' 마음 먹고 있었다. 사회 시간이었던가, 어쩌다 결혼제도의 종류와 일부일처제의 불합리함을 토론하던 수업 중에 나의 독신 성향이 발각되고 말았을 때, 욕쟁이 여선생은 내게 말했다. "저런 년이 제일 먼저 시집간다고 난리 치는 법이다. 다들 두고봐라. 쟤 학교 졸업하자마자 청첩장 돌리나 안 돌리나." 속으로 나 역시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셔.'
 
얼마 전까지도 공주는 아주 돈이 많은 부자랑 결혼해서 자기가 회사 나가서 일 안해도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여행다니며 살고 싶다고 말해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왜 옳지 않은지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달까. 주체적인 삶이 어쩌고 경제적인 종속이 어쩌고 몇 마디 하다가 그냥, 그런 건 나중에 커서 결정해도 된다고, 어른 되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제 엄마에게 또 한번 "너 나중에 결혼하면.... 어쩌구 저쩌구..."하는 잔소리를 듣던 조카가 며칠 전엔 대뜸 자기는 결혼을 하지 않고 '고모처럼 살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고모가 얼마나 행복한데 그래!"라고 부연하면서. +_+ 진정한 행복 여부를 떠나 순간 어찌나 공주한테 고맙던지! 물론 조카의 의도는 '고모처럼' 계속해서 부모에게 얹혀 살며 캥거루족이 되겠다는 것이어서 제 엄마를 더욱 펄쩍펄쩍 뛰게 만들었지만, 옆에서 듣는 나는 염려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스스로 요즘 내 삶이 과연 행복한가 회의에 빠져있던 시기라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소소한 데서 찾는 깨알 같은 행복으로 만족하기엔 속물스러움이 점점 심해진다. 욕심은 커지고 몸을 써서 들이는 노력은 차츰 아끼고만 싶다. 불평과 짜증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 이마엔 깊은 三자 주름이 새겨진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가끔씩 촌철살인 예리하게 솔직함을 드러내는 공주에게 들은 '행복해보인다'는 말에 얼마나 기운이 솟는지 모르겠다. 요즘의 감정곡선으론 몇달 안 지나서 또 죽상을 하고 있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꽤 훌륭한 자기최면의 화두가 될 것 같다. "고모가 얼마나 행복한데 그래!"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