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사과

투덜일기 2010. 9. 13. 17:44

사과 중에 내가 제일로 치는 품종은 역시나 새빨간 '홍옥'이지만, 풋풋한 맛의 파란 사과도 그에 버금가게 좋아한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과 1, 2위는 '빨간 사과, 파란 사과'다.(홍옥을 제외한 다른 품종의 사과엔 '빨갛다'는 말도 붙이기 어렵지 않은가! 그저 붉은 정도지...-_-;) 아쉬운 건 내가 좋아하는 품종들이 지극히 짧은 기간에만 유통된다는 점이다. '아오리 사과'로 불리는 파란 사과도 요즘에나 먹을 수 있지 좀 지나면 -- 아마도 추석이 지나고 나면 -- 구경하기 힘들어질 거다. 그러니 요맘때 얼른 실컷 먹어주는 수밖에 없다. 과육이 부드럽고 새콤달콤한 홍옥과는 또 다르게 아삭거림이 강하면서 껍질이 얇고 약간 떫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역시나 새콤달콤한 과즙이 풍부한 파란 사과는 나름 매력이 철철 넘친다.

'파랗다'라는 우리말은 정말로 '파란색'부터 '초록색'에 이르기까지 푸른 계통의 색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니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신호등에도 파란 불이 들어오고 사과도 파랗다고 말하는 게 어른들에겐 어색하지 않은데, 아이들이 듣기엔 아무래도 이상할 수밖에 없다. 유치원에서도 신호등 파란 불은 '초록 불'이라고 고쳐 배우는 모양이니 말이다. 제일 어린 조카가 네살이었던 작년 이맘때, 집에 놀러온 녀석에게 "파란 사과 먹을래?"라고 물었더니 대뜸 세상에 파란 사과가 어디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뜨끔한 내가 "초록 사과, 아니 연두색 사과 말이야"라고 고쳐 말했더니, 녀석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으응, 아오리 사과?"라고 대꾸했다. '아오리 사과'를 아는 네 살 짜리 어린이는 이 세상에 또 없을 거라고 나는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었는데, 올해 다시 파란 사과를 통째로 들고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으며 생각하니 '파란 사과'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조카들에게도 가르쳐줘야할 것만 같다.

어른들이 초록색이든 연두색이든 푸르딩딩한 남색이든 하늘색이든 죄다 '파랗다'고 말하는 건 색깔 구분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색깔조차도 크고 넓고 풍요롭게 지칭하는 마음의 여유 때문이라고. 연두색이 예쁜 파란 사과는 역시나 '아오리 사과'라고 부를 때보다 '파란 사과'라고 부를 때 느낌이 제격이다. 백설공주가 먹고 쓰러진 반만 빨간 사과도 덜익은 반대편 절반은 '파랗게' 덜익었다고 해야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아무려나 바야흐로 파란 사과의 계절, 내가 원없이 먹었다고 느낄 때까지는 너무 빨리 모습을 감추지 않으면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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