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번씩 이맘때가 오기를 기다린 사람들이 많다지만, 나는 4년에 한번씩 이맘때가 지겹다. '누구나' 월드컵에 '당연히' 열광하고 즐겨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 축구를 좋아하고 특히 국가 대항전은 더욱 좋아하고, 한국선수들 이외에도 현란한 발기술과 전술을 선보이는 전 세계 축구선수들의 기량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가슴이 두근두근 설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열정이 '보편적'이므로 모두들 그 열정의 물결에 휩쓸려야만 '정상'인 듯 몰고가는 상황들이 나는 짜증스럽다.

이미 광고는 죄다 붉은 물결로 도배가 되었고, 웬만한 오락프로그램도 월드컵 특집을 선보일 기세다. SBS가 독점중계권을 따내는 바람에 국민의 시청권이 침해되었다고 난리인데, 막대한 돈을 들여 다시 큰 돈 벌어보려는 꼼수를 쓰는 SBS는 내가 봐도 얄밉긴 하지만 월드컵 시즌마다 나 같은 월드컵냉소분자의 시청권은 늘 침해되고 무시되지 않았나 말이다. 타 방송국에서 소송까지 제기하며 중계권 다툼을 벌이는 모양인데, 솔직히 나는 월드컵 기간에 똑같은 경기를 앵커와 해설자만 바꾸어 틀어주는 걸 참아내느니 독점권 때문에 다른 방송에선 정규 프로그램을 틀어줄 수밖에 없을 요번 상황이 오히려 반갑다. 이런 나한테 대다수의 월드컵 팬들이 욕을 해대든 말든, 소수자인 내 의견은 그렇다는 뜻이다.

어제는 외출에서 돌아오다 차에 기름을 넣었는데, 주유를 끝낸 주유원이 대뜸 나에게 외쳤다. "화이팅입니다!"
난 당연히 그 말을 못알아듣고, 뭔가 더 볼 일이 남았나 싶어 되물었다. "네?" 
알고보니 대한민국 화이팅이라는 말이란다. -_-;; 잠시 그도 나도 뻘쭘해졌음은 물론이다. 얼른 창문을 올리고 주유소를 빠져나오며 문득 궁금했다. 월드컵을 오매불망 기다려온 붉은악마라면 주유원과 함께 '대~한민국!" 구호와 함께 그 유명한  박수도 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기는 것도 없이 그저 열정만으로 월드컵 응원을 위해 며칠 밤을 새고 봉사하고 즐기는 축구팬들을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뻘건 티셔츠 맞춰입고 길바닥에서 길길이 뛰며 환호하는 길거리 응원 따위에 휩쓸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오죽하면 2002년에도 연구실에서 공부하다 학교 노천극장에서 들려오는 왁왁대는 함성이 시끄러워 짜증내며 집에 돌아왔을까. 이탈리아 전을 하고 있었던가, 길거리까지 한산하고 오래 기다려 도착한 버스엔 손님이 단 한명도 없어 학교에서 우리집까지 거의 논스톱으로 오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의 그런 집단적인 행동과 반응이 섬뜩하니 무서웠다.

8년 전엔 월드컵에 관심 없고, 5시간씩 화장실 참아가며 길바닥에서 탈진할 때까지 거리응원을 하는 아이들을 미쳤다고 여기는 나의 태도가 거의 돌맞을 수준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래도 요샌 드물게나마 나와 같은 의견을 공공연히 토로하는 이들도 있고, 또 월드컵 안본다고 해도 정신나간 사람 취급하는 건 아닌 인식이 조금씩이나마 자리를 잡는 듯하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주제든 자기와 의견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그 다른 의견이 극소수라는 이유로 '이상하다, 유별나다, 비정상이다'라고 손가락질하는 대신에 흔쾌히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선선한 태도와 아량이 아직은 까마득히 먼 집단주의 사회이긴 해도, 티나게 욕하지는 않는 예의를 갖춰가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이왕이면 한국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많은 이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앞으로 몇주간 (월드컵이 언제 끝나더라?) 개인적으로는 월드컵을 안 볼 수 있는 소중한 나의 권리가 얼마나 지켜질지 그걸 더 열심히 관찰할 작정이다. 온 나라가 시끄러울 터이니 집안에서 조용히.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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