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수요일

투덜일기 2010. 3. 31. 13:10

요즘 거의 라디오를 안 들어서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비오는 수요일엔 다섯손가락이 부르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란 노래가 자주 나오는지 궁금하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이미 해체된 그룹이니 내 또래가 아니고선 <다섯손가락>이란 이름조차 낯설듯한데, 동방신기가 부른 <풍선>인가 하는 노래도 원래는 다섯손가락이 부른 노래였다. 유난히 수요일에만 비가 자주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들었던 그 노래 덕분에 비오는 수요일엔 종종 빨간 장미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기도 했다. 그 세뇌작용이 얼마나 강렬한지 오늘처럼 비오는 수요일엔 아직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노래가 생각나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빨간 장미 한송이를 사볼까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천편일률적으로 한송이씩 셀로판지에 둘둘 말아 리본 묶어 놓은 거 말고, 이왕이면 튼튼한 대를 길게 잘라 아무 포장 없이 그냥 들고 올 수 있게 하는 꽃집에서.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내일이면 4월이다. 예전엔 4월이 열리면 이런 저런 만우절 에피소드와 함께 어김없이 April come she will~로 시작되는 사이먼&가펑클의 <4월> 노래를 이방송 저방송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혹시 요즘도 그럴까? 혹시나 틀어줄지 내일은 온종일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보고픈 마음도 든다. 음악이 듣고 싶으면 찾아서 들으면 될 것을 라디오를 먼저 떠올리는 것도 내가 구식이고 옛날 사람이라는 증거겠지. 

엘리엇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한 이유는 단단한 죽은 땅을 뚫고 솟아나는 봄의 생명력 때문이라는데도, 다른 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4월은 봄꽃의 달이라 꽃의 향연 속에서 팍팍한 일상에 찌들어야 하는 상황을 잔인하다고 여겨 툴툴댔던 것 같고, 올해도 역시나 나의 4월은 잔인한 스케줄을 품고 있다. 학교에 다닐 땐 하필 제일 날씨 좋고 봄꽃 아름다울 때 중간고사 기간이라 잔인하다기보다는 억울한 4월이라고 생각했다고 쳐도, 다들 굳이 다른 달보다 4월을 더 힘겨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느끼는 걸 보면 분명 주입식 교육의 잔재다. T. S. 엘리엇. 황무지.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무운시. 그러니까 4월은 무조건 잔인한 달. -_-;

어쨌거나 촉촉한 비가 내리는 수요일이라 몰랑몰랑해진 감성은 음악을 멀리하고 살아도 아무렇지 않은 인간에게까지 감상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비와 함께 연상되는 음악, 커피, 추억 같은 것들도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세대만 품고 있는 주입식 기억의 흔적일지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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