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투덜일기 2010. 3. 14. 16:35

왕비마마의 칠순모임은 잘 끝났다. 일주일 전까지도 "니들끼리 가라, 난 창피해서 안 갈란다"고 버티던 왕비마마는 D-데이를 나흘 앞둔 날 자진해서 새로 파마를 하고 오셨고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골라두며 호의적인 태도로 돌아서 마음을 놓게 했고, 어젠 최상의 컨디션과 환한 얼굴로 주인공 노릇을 훌륭히 해내셨다.

연회실 규모가 정해져 있는 바람에 혹시 예약인원과 참석인원이 크게 달라 자리가 모자랄까봐 염려했던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는데, 못온댔다가 뜻밖에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다고 했다가 못오신 분들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조정한 예약인원과 딱 떨어진 셈이었다. 전화 거는 거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초대전화부터 참석확인 전화까지 돌려대느라 참 애썼다. 스스로 장하다. -_-;

오래전 외할머니의 산수연에서 예상밖으로 손님이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뷔페 음식이 모자랐던 망신살을 모두 기억하고 있던 터라, 모임을 예약하면서 우리가 가장 강조하고 확인한 게 음식이 계속 리필되느냐는 점이었다. 나의 식탐도 식탐이지만, 좋은 날 손님들이 밥 먹다가 음식 모자라는 것만큼 민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어제 호텔에 미리 도착해서도 그 점을 재차 부탁해두었는데 ㅋㅋ 차린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아 안타까울 정도였다. (외할머니 산수연을 한 호텔이 더 유명한 데였는데 거긴 왜 음식이 모자랐을까 이상하다. 인원차가 너무 컸던 것일까?)
 
어르신들은 오락가락 돌아 다녀야하는 뷔페를 싫어하시는데도 굳이 뷔페식으로 정한 건 모이는 시간 때문이었다. 한정식이나 중식은 다 모여야 시작할 수 있는데 한국사람들이 어디 그런가. 양식은 우리집 어른들이 더욱 싫어하시고... 거기다 우리집 바로 옆이라는 이점 때문에 최종 선택된 장소는 뷔페식당 맛이 별로 없는 것으로 유명(?)해 내심 꺼림칙했었다. 메뉴를 선택할 때도 잠시 머리털 쥐어짜며 고민했지만, 뷔페 음식이 맛있어 봤자고 또 맛없어 봤댔자 한끼 정도는 눈감아 주리라 믿으며 마음을 접었다. 그나마 뷔페 주방과 연회 주방은 다른 곳이라고 해서 혹시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가 낮았던 때문인지 음식 맛도 대체로 괜찮았다. 친척분들이야 인사치레로 맛있었다고 하실 수 있겠지만, 입맛 까다로운 조카들이 인정해주었으니 안심.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부분은 사회자를 비롯해 마이크까지 일절 필요없다고 얘기해 놓았는데, 뜻밖에도 조카 두 녀석이 축하노래 공연을 하겠다고 나섰던 점이었다. 무반주에 마이크도 없이 용감한 형제가 <죽어도 못보내>(클라이막스 부분)와 <사랑비>(전곡^^;)를 부르는 바람에 분위기가 한층 더 즐거워졌으니 나중에 마이크 가져다준다고 어수선해졌던 것까지도 유쾌한 해프닝이었다. 또 어린이들만 죄다 앞으로 불러내 케이크 앞에서 왕비마마 할머니를 위한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촛불 켜주는 직원이 음을 너무 높게 잡아주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노래가 엉망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하마터면 좋은 날 나 혼자 울컥 해서 질질 울뻔 했던 위기를 웃으며 넘겼으니 결과적으로 다 좋았다.

간만에 높은 구두를 신어서 그러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무사히 행사를 마친 다음날의 피로감은 꽤나 묵직하다. 어쨌든 다 끝났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또 10년 맘 놓고 살 수 있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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