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정원

투덜일기 2010. 2. 11. 23:30

제일 처음 거인의 정원 이야기를 읽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요즘 특히 신빙성에 도전을 받고 있는 나의 부실한 기억으론 <분명>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였던 것 같은데 자신은 없으니 (근데 왜 <분명>이라고 쓰고 싶은지) 찾아볼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 마음대로 구성해 놓은 내 기억속의 <거인의 정원>은 국어책에 들어 있었고, 학기초에 새책을 받아오면 달력 뒷장으로 책표지를 싸면서 먼저 교과서 들춰보는 걸 좋아했던 어린 나는 거인의 정원 이야기를 읽고 너무 슬퍼서 눈물을 조금 흘렸거나 울뻔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을 내쫓는 바람에 봄이 찾아오지 않아 춥고 모진 겨울만 존재하는 거인의 정원과 나중에 욕심을 버렸는데도 결국 그 정원에서 쓸쓸히 맞이하는 거인의 죽음이 어찌나 슬프던지.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야 그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란 걸 알고 나서 반갑게 다시 읽어보니, 어린 시절에 읽은 내용은 꽤나 각색된 것이었고 원작은 기독교적인 결론이라 솔직히 크게 실망스러웠다. 어린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던 비극적인 결말이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주변과 달리 드물게 눈이 쌓여 이상스레 녹지 않는 공간을 볼 때면 지금도 습관적으로 <거인의 정원>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거인의 정원을 뜻밖에도 우리집 마당에서 발견했다. 오늘 오전에 집을 나설 때쯤엔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쌓였던 눈이 푹한 날씨에 순식간에 녹아 오후에 귀가할 땐 눈이 언제 왔던가 싶게 말갛게 씻긴 모습이라 내심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집앞 계단을 올라와보니 손바닥만한 마당엔 하얗게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더란 얘기다. 오후엔 분명 진눈깨비가 내리다 기온이 영상이라 비로 바뀌었던데 잔디밭도 아니고 콘크리트 시멘트로 뒤덮인 그 공간에 쌓인 눈은 왜 온전한 것인지. 갑자기 높은 담벼락을 둘러싸놓고 홀로 사는 욕심쟁이 거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괜스레 등허리로 찬바람이 지나갔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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