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유예

투덜일기 2009. 12. 17. 03:15

대개 책 한권에 두달 정도로(물론 최소 넉달 이상 잡아야 하는 책도 있긴 하다) 번역기간을 정해놓으면 첫 한달은 작업량이 형편없다. 그야말로 워밍업 기간.
그놈의 워밍업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어느 첫달엔 심지어 첫장만 계속 펼쳐놓고 있던 적도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그래도 둘째달이 시작되면 남은 날수에 맞춰 일일 작업분량을 정해놓는다. 이번 책은 비소설이고 챕터가 달랑 열개. 하루에 한 챕터씩 하면 열흘이면 초벌 끝내겠네, 싶어 쓸데없이 가소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크게 방심해선 곤란했다. 연말이랍시고 엠티부터 시작해서 몇몇 모임과 행사까지 있는데, 원고마감 핑계대고 놀 일에 빠질 위인이 아니므로 최소한 일주일은 없는 셈 쳐야 했으니까.
새벽까지 앉아 있어도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았던 월초를 보내며, 엠티 다녀오면 작업에 박차를 가해 가속도를 높이리라 마음 먹었는데 그놈의 끔찍한 숙취는 후유증을 이틀이나 안겨주었고, 정신 차려보니 허거덕 남은 날은 한달의 반토막이었다.
진도는 아직도 지지부진한 주제에 초인적인 가속도가 붙었을 경우에나 가능한 <하루 한 챕터 번역>의 야망을 버리지 못한 채, <잘하면> 계약 마감일에서 늦어도 일주일 내로 원고를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상상하던 차였다. 마침 출판사에서 내년 출간 계획을 잡아야 한다며 원고 진행상황을 묻는 메일이 날아왔다. 앗 뜨거라 싶어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나의 상상 마감일을 적어보냈더니만, 흐흐흐 원고마감 때문에 연말 연휴에도 일에 매진하는 게 아니나며 한껏 위로하는 글과 함께 원고는 1월 중순까지만 보내면 된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아싸~
마침 그 메일을 열어보는 중에 뒤에 서 있던 조카가 한 마디 했다.
"우리 고모는 놀 때 안 놀고 일만 하는 사람 아닌데. 놀 거 다 놀고 또 밤새서 일하는 사람인데..."
너무도 정곡을 찌른 그 말이 칭찬인지 꾸지람인지 언뜻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흐흐 웃고 말았다.

헌데 문제는 어제까지도 그럭저럭 조여졌던 긴장의 끈이 연말유예 메일과 함께 풀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열흘 쯤 더 여유로워졌다고 당장 이밤에 또 일이 하기 싫어졌으니 원! 다시 조이는 데 한달 반이나 걸린 이 긴장의 끈을 다잡으려면 일단 이렇게 널리 자아비판을 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여 또 부끄러운 쉰소리 끼적이고 앉았다. 당장 낼모레로 다가온 할아버지 제사부터 간간이 잡힌 <놀 일>을 감안해서 제발 밤을 샐 때는 진지하게 진짜 일을 해보자. 좀!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