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

투덜일기 2009. 12. 14. 15:17
강화도에 간다고 하니 왕비마마는 올 때 "순무나 사와라, 심심할 때 깎아먹게."라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잘 알지만, 왕비마마는 <언제나> 심심하다. 온종일 TV를 동무삼으면서도 심심하다고 간간이 일하는 딸을 귀찮게 굴어 타박을 받을 정도니 나도 할 말이 없다.
심심하다는 핑계로 괜히 찾아다니는 간식만 안먹어도 체중 줄이기에 성공할 수 있을 텐데, 식탐도 강하고 과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분이라, 그나마 열량이 적은 순무나 무, 콜라비 따위를 군입거리로 삼겠다 할 땐 반가워해야 한다.

오래 전 가족끼리 강화도에 놀러갔을 때도 순무를 사왔는데 만원에 한 보따리였던 것 같다. 이번에도 가격을 물으니 알이 작은 건 6개 5천원, 큰 건 5개 5천원이라고 했다. 동생네가 와 있단 얘기를 안들었으면 5천원어치만 샀겠지만, 공주네 식구도 다이어트 때문인지 날로 깎아먹는 무를 좋아하는 편이라 큰놈으로 만원어치를 달라고 했는데, 알이 굵어선지 꽤 무거웠다. 며칠이든 당일치기든 어딜 다녀오면 그 지방의 특산물을 뇌물로 바치지 않으면 삐치는 집구석은 우리밖에 없나보다. ㅋㅋ 
어쨌거나 아줌마는 분명 순무 잎을 잘라 비닐에 담으며 "하나 더 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 집에 와보니 달랑 열개 뿐이다. 내가 전날의 과음으로 여전히 숙취에 시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나는 치밀하질 못해서 물건을 살 때 장사치의 셈에 그냥 맡기는 편이다. 과일을 살 때도 굳이 같이 세지 않는다. 내가 특히 셈에 약하기도 하고, 알아서 담겠지 싶어서... 그래서 실수인지 속임수인지 모르지만 가끔은 손해를 보기도 한다. 확인 안한 내 잘못이 크지만, 그래도 과일의 갯수가 모자란다든지 슬그머니 못생기고 상처 난 과일을 집어넣은 걸 발견해 장사치의 얕은 속임수임을 실감할 땐 잠깐이지만 인간이 싫어진다. 

순무의 경우는 어차피 10개가 만원어치이므로 내가 손해본 건 없다. 내가 덤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한 개 더 주겠다고 해놓고 10개만 넣은 건 아무래도 실수인 것 같지만 그래도 뜨내기 장사라고 나를 허투루 대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는 않다. 어제 내가 오자마자 왕비마마는 큼지막한 순무를 한 덩어리 잡아 조카와 함께 뚝딱 해치우셨다. 그래도 여전히 열개나 있으니 동생네와 반반씩 나눠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순무가 9개 뿐이라는 사실에서 그만 나는 잠깐 와락 짜증이 났다. "그 아줌마 뭐냐!" 나의 분노를 식탐과 순무 욕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동생네는 달랑 순무를 2개만 얻어갔다. ㅋㅋ

오늘도 심심해진 왕비마마가 깎아준 순무의 맛은 그저 그렇다. 날 무보다 좀 단단하고 부위에 따라 단맛이 좀 더 많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무의 매운 맛과 비슷하게 알싸한 맛으로 씹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내겐 지금 순무의 맛이 중요하지 않다. 순무 장수 아줌마가 10개를 11개로 잘못 센 것인지, 덤을 하나 주겠다고 한 말을 그새 까먹은 것인지, 덤을 주는 척 괜히 생색만 내는 게 그곳 마케팅의 수법인지, 아니면 내가 헛것을 들은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남은 순무가 다 없어질 때까지 나의 의문은 반복될 것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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