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르기

책보따리 2009. 11. 30. 06:12
책을 읽고 나서 꼼꼼한 후기를 블로그에 올리시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책으로 밥 벌어 먹고 살면서 민망하게도 그리 책을 많이 읽지도 않지만, 그나마 드물게 읽는 책의 경우도 내가 좀체 후기를 쓰지 못하는 건 직업병과도 관련이 있다.

전에도 푸념을 한 적이 있지만 번역을 맡아 일을 하는 과정 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은 <책 검토와 검토서 작성>이다. 순수한 독자로서 책을 읽으면 좋다 싫다 별로다 괜찮다 정도로 뭉뚱그려 판단할 수도 있고 중간에 집어던졌다가 맘 내킬 때 다시 읽거나, 아예 끝내 포기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책의 재미와 가치 여부는 물론이고 상업성은 있겠는지, 독자층은 어떤지, 기존의 책들과는 어떻게 차별화되거나 유사한지, 내용 요약과 책을 조목조목 분석해서 판단하는 의견까지 내놓으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노라면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책멀미를 느낀다. 논리와 분석력이 떨어지는 인간에게 책 한권을 읽고 객관적인 검토 소견을 제시하는 일이란 몹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해서 바쁜 일정을 핑계삼아 책 검토는 애써 사양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는 법이라,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읽고 검토서를 만들어야 할 때면 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냥 독자로서 책을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거다. 다행히 재미있게 책장이 넘어가면 호감어린 검토서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시작도 전에 느꼈던 책멀미가 계속 이어진다면 비판적으로 헐뜯는 의견을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늘 두려운 건 독자로서 나의 객관성이 얼마나 합리적일까 하는 점이다. 단순히 독서할 책을 추천하는 것이라면야 누군가 읽고나서 투덜대며 별로였다고 던져버려도 상관없지만, 원서에 지불해야하는 저작권 로열티부터 제작비까지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들 <가치>가 있는 책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한다. 

번역만으로는 당연히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번역 초창기 시절 나는 월급을 받으며 비상근으로 어느 출판사의 기획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말이 그럴듯해 출판 기획이지, 내가 하는 일은 저작권 중개 사무소를 돌아다니며 책을 추천받고 꼼꼼히 검토해 <대박>날 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경제경영서 같은 무지한 분야의 책들을 고르는 건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종류의 책을 접하고 읽는 게 좋아서 처음엔 꿩먹고 알먹는 일이라고 기뻐했었다. 요것조것 책을 골라 읽으면서 정기적인 수입도 생겼으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출판 경력도 전혀 없는 내가 어떻게 개인적인 취향이나 재미 여부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잘 팔릴> 책을 골라낸단 말인가! 출판사에서 원하는 건 <베스트셀러>가 될 책 90% + <출판인으로서 의미 있는 책> 10% 정도의 비율이었으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책은 얼마든지 추천 가능해도 <잘 팔릴 책>을 찝어내는 건 로또 번호 찍기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저작권 중개사무소에서 소개받은 <유망한> 책들을 다 읽고 검토서를 만들어 기획회의를 거쳐 높으신 분들이 결정하도록 책임을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놓친 고기는 늘 커보이는 법이라고, 내가 보기에 괜찮은 책 같아서 열심히 추천하다가 막판에 꼬리를 내려 출간을 포기했는데 그 책이 다른 출판사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 난 곧 지탄을 받았다. 워낙 좋으신 분들이라 심한 얘긴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좀 더 강력하게 출간을 주장했으면 안 놓쳤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내가 완전 별로라며 소개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던 원서가 그럴싸한 포장으로 날개돋친듯 팔려나갈 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베스트셀러가 다 좋은 책은 아니란 건 누구나 알지만, 아무리 문화산업의 자긍심을 품은 출판사라고 해도 우선은 매출이 높아 돈을 많이 벌어야 그 여력으로 <많이 팔리진 않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최종 결정은 다 같이 했더라도, 비싼 저작권료 지불해가며 공들여 출간한 책이 맥을 못추고 안팔려도 애당초 맨 처음 그 책을 집어왔던 장본인인 나는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대체 출판이 도박과 다른 점은 뭐란 말인가!

책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도 좋았고 책 자체를 읽는 재미는 충분했지만 나는 3년만에 결국 <책 고르기>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아예 외서 기획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내게 그 일을 맡겼던 출판사 사장님의 깊은 뜻은 번역가로서 책 고르는 안목을 높여 주어지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책을 선정하고 기획해 출판을 주도하는 역할까지 하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런 재목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가끔 아마존이나 뉴욕타임스 북리뷰 같은 사이트에서 좋은 책을 찾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는 출판인들이 계시지만,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만 긁적이는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게을러서 그럴 시간이 잘 없네요..."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블로그 이웃 가운데 동종업계에서 번역에 힘쓰고 계신 두 분은 놀랍게도 번역과 함께 그 어려운 <책 고르기>를 병행하고 계신다. 재미 있으면서 가치도 있는 책을 골라 어렵사리 출간을 권유하고, 또 번역을 맡아 그 책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땐 성취감과 뿌듯함이 몇배는 더 클 것이다. 더욱이 그 책이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어 <잘 팔리는 책>으로까지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지만 막연히 그걸 짐작하면서도 겁쟁이에 게으름뱅이이자 소심증 환자인 나는 의식 있는 번역가의 책무라고 하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책 골라 권하기>는 고사하고 출판사에서 골라준 원서 읽고 검토서 하나 만들라고 하는데도 어깨가 무거워 한숨을 쉬는 위인임에야 어쩌겠는가.

마뜩찮게 도맡은 책 검토를 할 때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건, 번역작업을 맡을 욕심에 재미없는 책을 재미있다고 의견을 내거나 가치없는 책을 가치 있다고 추켜세운 적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사적으로 싫은 분야가 아닌 한 웬만한 책은 소소하게 읽는 재미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이미 다른 언어로 세상에 선을 보인 책은 누군가 출간할 가치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므로, 그 분위기에 얼렁뚱땅 편승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또 다시 수천만원 이상의 돈과 노력을 들여 나무 없애가며 다시 우리말로 책을 펴낼 의미가 있을지 곱씹어보자면 나는 웬만하면 회의적인 태도로 기울게 된다. 어쩌면 출간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수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책이 안팔려도 최초 검토자로서 덜 민망하도록. 물론 검토자에게 추후 책 판매 여부의 책임을 묻는 출판사는 없다. 검토자가 아무리 칭찬을 하거나 혹평을 해도, 결국 최종 결정은 출판 기획자의 몫이니 말이다.

번역서든 창작서든 이 땅에 나오는 수많은 책들은 하나같이 여러 사람의 고민과 염려와 손길을 거쳐 탄생한다. 얼마 전 본 기사엔 3만개도 넘는 국내 출판사 가운데 작년에 한 권 이상 책을 낸 곳이 10%에 불과하며, 나머지 90%는 단 한 권도 책을 펴내지 못했을 정도로 출판시장이 열악했다고 한다. 서점에 나가보면 지천으로 깔려있고 쌓여있고 꽂혀 있는 게 신간이던데, 그게 겨우 10%였다니.

올해 상황은 어떠했을지 지나봐야 알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의 먹고 사는 형편이 극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한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책 산업이 돌연 호황을 누릴 리 만무하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어렵디 어려운 <책 고르기>와 <책 만들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출판인들이 보람을 느끼려면 그래도 누군가 꾸준히 책을 읽어주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골치아프게 만들어 내놓는 입장보다야 선뜻 집어 읽는 입장은 얼마나 더 수월한가. 확실히 나는 독자쪽을 더 선호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막상 읽기를 소홀히 하는 걸 보면 책으로 밥 벌어먹을 자격이 부족한 것도 같다. 2009년 정리할 때 덜 부끄럽도록 마지막 남은 한달 동안 몇권이나 더 읽을 수 있으려나 마음이 조급하다. 검토서 멀미증의 영향으로 독자로서 읽은 책의 후기를 쓰는 것 또한 못할 노릇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웃 애서가들에게 자극을 받아 올해는 읽은 책을 기록하는 독서노트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정리에 젬병인 위인에겐 큰 발전인데, 이러다 보면 시답잖은 감상이라도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꼬박꼬박 독서후기를 쓸 날도 오게 되려나 어쩌려나 두고볼 일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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