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자

투덜일기 2009. 10. 30. 15:08

얼마 전 방송계에 복귀한 개그맨 이성미가 방송에서 얼핏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 바닥에서 자기가 너무 오래 돼 화석 같은 존재가 된 느낌이라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얼핏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울 엄마나 아버지가 그 옛날 피난 갔을 때 경험담을 들으며 보였던 신기하고 뜨악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예를 들면,
"나 어렸을 땐 달걀이 귀하고 비싸서, 외삼촌 따라 달걀 프라이 하나 간식으로 얻어 먹는 게 엄청난 행복이었지..."
"어린이날 되면 학부형들이 학교에 와서 줄줄이사탕, 라면땅  같은 과자를 선물로 나누어 주었는데, 새로운 엄마들이 학교 운동장에 나타날 때마다 다들 목을 쭉 빼고 누구 엄마일까 기대를 했다니까..."
"옛날엔 전화세가 워낙 비싸서 우리집에도 처음 전화가 생긴 게 나 중1 때였나 그랬어.."
같은 이야기들.
우리 조부모님 세대와 부모님 세대만 파란만장한 시대의 변천을 겪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으로 따지면 누구나 파란만장한 시대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어느덧 나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순히 공유하기 어려운 추억 때문에라도 점점 나이든 세대로 떠밀려나고 있는 기분이고, 특히 <요즘 여자>의 범주엔 도무지 들어갈 자신이 없다.

가끔 연애 중인 남자 후배들한테 <요즘 여자애들 왜 그래요?>라는 푸념 섞인 질문을 받곤 하는데, <요즘 여자>가 다 그런 거 아니라고 버럭 호통을 쳐주긴 하지만 나 역시 <대다수의> 요즘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개그콘서트에서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이름으로 풍자하고 꼬집는 요즘 여자애들의 세태에 나도 웃음지을 수 있는 이유는 역시나 내 눈에도 그들이 못마땅하기 때문일 거다. 어렵사리 연애를 시작한 남자 후배들은 연봉의 고하를 막론하고, 연애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멋있고 맛있는 곳으로 <다 알아서> 데이트 코스를 확보해 놓아야함은 물론이고, 차 없이는 데이트가 불가능하다고 믿는데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당연히> 명품가방이나 구두, 최소한 지갑이나 명품 귀고리라도 해줘야한다고 생각하는 여자친구의 비위를 맞추려니 경제적인 타격도 엄청나고 가치관마저 뒤흔들릴 지경이라나.
"안 그런 여자애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골빈당하곤 당장 헤어져!"라고 해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른 <건전한 사고를 지닌> 여자애들을 소개해줄 것도 아니고 그럴 만큼 그들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도 없으니 같이 한숨을 쉬어주는 것밖엔 별 도리가 없다. 게다가 그런 줄 몰랐는데, 차츰 이른바 <된장녀>의 특징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인들도 꽤 되는 마당이라, 역시 나는 이 사회에서 확실히 소수에 속하는 삐딱이구나 싶은 생각이 더 강해졌다.
얼마 전에 만난 후배와도 10년 가까이 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나와 비슷하게 소박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여겼던 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예전의 소박함은 단순히 경제적인 여유가 덜 허락되었기 때문이었고, 이젠 어느 정도 수입을 갖추고 나더니 보란듯이 명품족의 반열에 올라섰다. 처음 그녀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로고 선명한 <루이뷔통> 숄더백을 들고 나왔을 때 난 눈쌀을 좀 찌푸렸지만, <튼튼하고 편하고 스타일이 산다>며 자화자찬을 하는 후배에게 <난 명품 좋은 줄을 모르는 촌닭이라서 잘 모르겠다>고만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 다음에 만났을 때도 알록달록 로고가 선명히 찍힌 앙증맞은 명품 핸드백을 들고나오더니, 얼마전엔 또 다시 새로운 명품가방에다 페라가모 구두까지 신고 나와선 명품 예찬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급기야 겨울 부츠를 사고 싶은데 이왕이면 남들과 차별화되게 명품으로 신겠다며, 페라가모, 디올, 프라다, 루이뷔통, 구찌, 버버리까지... 명품관을 죄다 섭렵하며 부츠를 신어보고 아직 시기가 너무 일러 수입도 되지 않은 부츠의 가격을 살폈다. "언니도 페라가모 구두 한번 신어보세요, 진짜 편해요!"라면서...

명품구두를 선호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자동차 데이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 구두는 어디나 카펫이 생활화되어 있는 서구식 생활에 맞춰 나온 신발이라 밑바닥이 몹시 얇아 우리나라처럼 맨바닥이 지천인 곳을 마구 걸어다니면 한달도 안 돼 바닥이 닳아버릴 테니까. 그래서 다들 밑바닥을 덧대어 신는다는데, 과연 그런 구두가 편해봤자지 나 같은 청바지 인생에게 운동화보다 편할까?
꼭 갖고 싶은 예쁜 물건이 있는데 그게 마침 명품이라 선택하는 것을 뭐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역시 나만의 멋진 가방을 꿈꾸던 시절, 정말로 마음에 꼭 차는 가방이 명품밖에 없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살 수 있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넓혀놓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명품 가방 몇 개 없으면 체면과 품위가 안선다고 생각하며 카드빚을 갚느라 돌려막기에 허덕이면서도 명품만 찾는 요즘 젊은 여자들의 생각을 나는 정말이지 이해 못하겠다.  
얼마 전 연애 100일을 맞아 커플링을 하게 된 후배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청했는데, 연애 조언을 하기엔 너무도 늙어버린(!) 나는 괜히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여자친구랑 의논해서 정하라고  딱 잘라 말했다. 비록 내가 <요즘 여자>의 범주엔 들지 않을망정, 촌스런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이상한 커플링을 끼고 싶어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쯤은 안다 이거지.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애는 금은방이나 악세서리 체인점의 커플링을 단박에 거절하고, <티파니> 반지를 껴야한다고 했단다. -_-;; 물론 티파니 백금반지를 사줄만한 재력이 안 되는 후배였기에 그 커플은 <티파니 은반지>로 커플링을 장만했고, 그 돈이면 금은방에서 충분히 금반지를 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던 후배는 나에게 또 한 번 <요즘 여자애들 대체 왜 그래요?>라고 물었다.
오드리 햅번의 우아한 자태가 인상적인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 이후, 웬만한 여자들이 품고 있는 티파니 선망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오드리 햅번도 만날 커피들고 빵으로 아침 먹으며 티파니 쇼윈도를 구경만 했단 말이지!!
이왕이면 웨딩드레스는 <베라왕>을 입으면 좋겠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는 그 여자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가 연예인인 줄 아나봐! 니가 내 동생이었으면 그런 정신나간 미친년하고는 당장 헤어지라고 조언하겠다만, 니가 알아서 해라."고.  

바야흐로 결혼 시즌이라 여기저기 청첩장도 날아들고 다행히 소문만 듣고 지나도 되는 결혼식의 소식도 들려오지만 <요즘 여자>들의 결혼풍속도 역시 천편일률적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면야 당연히 초호화판으로 치를 것이고, 심지어 전세금이 모자라 월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한이 있어도, 결혼식장은 반드시 <호텔>이거나 <호텔급>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단다. 그러고는 몇년간 통 연락도 않던 이들에게 축의금 확보를 위한 전화를 해대고, 결혼식 이후엔 당연히 입을 싹 닦듯 다시 연락을 끊는다. 심지어 아주 괘씸했던 어느 인간은 축하객은 안오고 축의금만 보내주는 것이 자기에게도 이득이라고, 7만원에서 10만원을 호가하는 호텔 결혼식 밥값을 생각하면 자잘한 축의금 봉투 들고 어중이떠중이 다 오는 것도 반갑지 않다고 했단다. 결혼식도 장사하듯 계산속을 보이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 여자애들> 정말 무섭다. 얼마 남지 않은 반갑지 않은 결혼식의 주인공도 분명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사방에 연락은 했으되, 멀고 먼 지방 결혼식까지 가야하는 친구들의 편의는 나몰라라 하는 그녀의 과거 행적을 감안해볼 때, <니들이 손수 비싼 차비 들여 올테면 오고 못 그러겠으면 양심상 축의금만 보내라>고. 흥!

더욱 슬픈 건 저런 <요즘 여자>들이 죄다 그럭저럭 <요즘 엄마>가 되어 돈과 경제적 성공밖에 모르는 천박한 사고방식으로 아이들 교육을 시킬 거라는 점이다. 보나마나 뻔한 악순환의 연속. 안 그런 요즘 여자들도 많다고 목소리를 높이고는 싶지만, 이젠 정말 잘 모르겠다. 난 이제 확실히 옛날 여자란 것만 확실해질 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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