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정본

책보따리 2009. 10. 14. 21:26

출판사가 옮긴이에게 무상으로 주는 증정본은 과연 몇부가 적당한 것일까?
번역계약서 내용엔 증정본의 부수까지 포함되어 있다. 내가 같이 일한 출판사들의 경우 10부 아니면 5부다. 물론 담당자들과 친하거나 굳이 친하지 않더라도 말만 잘하면 증정본을 몇 권 더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10여 군데 출판사가 죄다 그렇게 정해 놓은 것을 보면, 10부나 5부가 증정본의 적당한 숫자라고 여겨지는 모양이다.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책이 나오면 <예의상> 책을 달라는 이들도 많고 또 나도 여기저기 <예의상> 인사할 곳도 많아 증정본 5부론 턱도 없이 부족했다. 책이 모자랄 땐 주변머리 없는 인간 답게 남몰래 서점에서 책을 사서 전달하기도 했는데, 초창기엔 워낙 한군데 출판사와 주야장천 일을 했고 다른 일도 거들어 주게 되었으므로 얼마 후엔 책 좀 가져가겠다고 말만 하고 창고에 직접 들어가 몇부 집어올 수도 있는 형편이라 책꽂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예 증정본을 마다하고 달랑 한권씩만 집에 갖다놓기도 했다.

어느 때부턴가 내가 작업한 번역본은 반드시 두권씩 보관하기로 원칙을 세웠는데, 결과적으로 초창기에 작업한 책은 미리 증정본을 챙겨두지 않은 탓에 한권씩밖에 없는 경우가 꽤 된다. 10년도 넘은 책이니 당연히 절판된 데다 그 이전에 출판사가 문을 닫아버려 구하려면 헌책방을 노리는 수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까지 귀중한(?) 책은 아니라 그저 한권씩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보관본을 2권씩 챙겨놓겠다는 욕심은, 한권은 새책으로 남겨두고 또 한권은 오탈자나 번역상 미진한 부분을 표시해두었다가 재판이나 2쇄, 3쇄를 찍을 때 수정할 요량으로 품은 원대한 꿈이었다. 초보 번역가에겐 편집 전과 후의 원고를 검토하고 문장 공부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초창기엔 나도 책이 나오면 반드시 원서까지 다시 찾아보며 꼼꼼하게 읽어보고 눈여겨 보아야 할 곳엔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등의 정성을 들였다. 
허나 부끄럽게도 요즘엔 책이 나온 뒤 내가 다시 새삼스레 꼼꼼하게 오탈자를 살피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ㅠ.ㅠ 원서 검토할 때 읽어보고, 번역 전에 읽어보고, 번역 내내 씨름하고, 나중에 다시 역자교정까지 거치면 최소한 네번 이상 읽어야하니 제 아무리 재미있는 내용이라도 그 지경에 이르면 거의 멀미가 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출간이 늦어졌다거나 <정말로> 애정이 듬뿍 가는 재미있는 책이라면 다시 또 읽어보며 스스로 감동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내게 꼭 필요한 책이 두권이니, 증정본 5부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집에 온 동생들이 집어가기도 하고 특히 욕심쟁이 공주님은 제 엄마 아빠와 별도로 책을 따로 챙기는 형편이며, 가끔씩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는 책의 경우엔 얄밉게도 <너무도 당연하게> 증정본 한권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지인도 있다. 지금은 집에서 일을 하기에 망정이지, 작업실 있을 때는 한번씩 놀러왔다가 증정본이 그거밖에 안남았다는 데도 굳이 책을 뺏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_-;; 해서 어떤 책은 보관용으로 두세 번이나 직접 구입했을 정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래한 출판사라 선뜻 증정본 더 달란 말은 꺼낼 수도 없었고...
사실 증정본 10권이면 대개는 풍족하다 못해 많이 남는다. 블로그 이웃분들과 달리 내 주변엔 책을 열심히 읽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내가 번역하는 책들이 그닥 <양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 강권하기도 민망하여 절반 정도는 집에 쌓아놓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아예 증정본을 안주는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주는 출판사도 있다는 점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영화흥행에 힘입어 시리즈가 무려 백만부나 팔렸다는 문제의 그 소설은 출판사 직원들과 틀어진 뒤로 증정본 한 부 받지 못했다. 내쪽에서 당당히 요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시는 그 사람들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아서 그냥 보관용으로 서점에서 한 권씩 사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꼭 그런 책은 달라는 사람이 많다. 영화를 보고 온 공주님도 역시나 책을 탐내는 바람에 빼앗기고 다시 구입해야 했는데, 그 책의 증정본을 달라고 손 내민 지인들 몇몇에겐 열받은 사연을 전하고 <사보지도 말라!>고 조언했다. -_-;
소싯적에 도움을 많이 주신 출판사 사장님을 돕는 의미로 <무료봉사>했던 책도 얼마 전에 출간되었는데 내가 사긴 좀 속상하고 언젠가는 보내주겠지 무작정 기다렸더니 추석 전에 와인 두병과 함께 친히 책을 한권 주고 가셨다. 이왕이면 한권 더 주시지 딱 한권은 또 뭐람. 그 책도 어째 보관본 2권의 원칙에선 열외가 될 듯하다. 자꾸 열외가 많아지면 원칙도 무너지기 마련인데 젠장...

놀라운 것은 내 경우 증정본을 아예 못받는 섭섭함보다 <증정본 폭탄>처럼 느껴질 만큼 너무 많이 주는 것이 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 책이 두권짜리인 경우는...
몇년 전에 출간된 소설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새로운 출판사에서 내 원고를 다시 가져다 책을 냈는데, 아 글쎄 증정본을 20부나 보내준 게 아닌가! 1, 2권으로 나온 책이니 무려 40권. 택배회사에서 책 배달이 오면 나는 대개 1층 현관문에서 받아가지고 들어오는데, 그날은 어깨에 엄청나게 큰 박스를 짊어진 택배 아저씨가 나더러 비켜서라고 하더니 친히 2층까지 올려다주고 갔다. 안 그랬으면 아마 난 들지도 못했을 듯. 
그렇게 받은 20세트의 증정본은 당연히 골칫거리가 되었다. 좁아터진 집구석에 쌓아 놓을 데도 마땅치 않고 당연히 책꽂이엔 자리도 없고, 하필 두번째로 나온 책이라 책 좀 읽는다 하는 지인들은 이미 몇년 전에 나온 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처음 책이 출간되었을 때 출판사에서 하도 광고를 해대기도 했고 서점 순위에도 올라, 그땐 출판사에서 꽤 여러번 보내준 증정본이 부족할 만큼 주변에서 청하는 이도 많았고 내가 읽어도 좋았던 책이라 부러 선물도 했기 때문이다.

무거워서 선뜻 옮기지도 못하고 책이 10권씩 철끈으로 묶인 채 들어있는 증정본 박스를 현관에 계속 버려두고 있으려니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스트레스였다. 완전 새책을 확 내다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솔직히 이번 책이 수정보완본이긴 하지만, 난 장정이며 표지가 옛날 책이 더 마음에 든다)  책 소진을 위해 왕비마마는 모임 있을 때마다 들고 나가 친구들에게 나눠주시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참 나 2권짜리 두툼한 로맨스 소설을 어느 할머니가 읽으신다고!! 당연히 말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녀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증정본은 일단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컴퓨터 방 구석에 쌓여 있다. 방문을 열어놓으면 안보이는 구석탱이에. ^^
만일 내가 옮긴이가 아니라 지은이였다면 증정본 20부가 저토록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얼핏 든다. 처음 책을 내신 어느 선생님은 증정본 30부도 모자라서 정가의 70%를 주고 다량 구입하기도 했다는데 말이지...

증정본이 10부도 모자랐던 적이 있는가 하면 때론 5부로도 여유로우니 번역서 증정본의 적정 권수는 몇권인지 나로선 도통 알 수가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20부는 너무 많다는 거!
어쨌거나 고육책으로 선택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현재 다섯 세트 예약받아 놓았다. ㅋㅋ 혹시 이 책도 영화 덕분에 새삼 읽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아질지 어떨지 두고 볼 일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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