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국수

투덜일기 2009. 9. 17. 06:13
고추장 선전이야 그렇다 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이 화가 나거나 내숭떠느라 배를 곯고 집에 들어와 커다란 양푼에 밥을 잔뜩 넣고 온갖 나물반찬과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빈다음 아귀처럼 입에 떠넣는 장면을 보면 나는 너무도 상투적이고 진부한 느낌에 막 화가 난다. 드라마를 많이 안보는 편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얼마 전 황정민이랑 김아중 나오는 드라마에서도 양푼비빔밥 장면이 나왔던 걸로 기억나는 걸 보면(아니면 어쩌지...) 시뻘겋게 비빈 양푼비빔밥은 사람들 머릿속에 너무도 뿌리깊이 자리잡은 편견의 전형이 분명하다. 아직도 그런 장면을 포기 못하는 작가들이 게으른 건지, 아니면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흔한 일인지 따져보자고 나선다면 나는 분명 전자에 한표.
양푼에 비비는 건 싫지만 어쨌든 나도 가끔 비빔밥이 먹고 싶어지지만 그렇게 수시로 아무때나 오밤중에라도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환경은 절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비빔밥을 먹으려면 일단 나물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명절이나 차례 때처럼 삼색, 오색 나물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두 종류는 있어야지, 아니 최소한 맛있는 깍두기나 열무김치라도 있어야 밥을 비벼먹지! 암튼 내 경우 비빔밥은 내가 각별히 신경써서 고사리 나물을 볶았거나 가지나물과 호박나물을 동시에 만들고 거기다 고구마순 나물까지 갖추어 놓았다든지 해서 벼르고 해먹는 별식이다. 아무때나 양푼 꺼내들고 화풀이 하듯 숟가락을 휘둘러대는 오밤중의 해프닝 같은 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자꾸 딴소리가 길어지고 있는데 암튼 그런 <어려운> 비빔밥 대신 비빔숙수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김치만 넣고 밥을 비벼먹는 일은 나에게 있을 수 없으되, 소면 삶아서 김치만 송송 잘라 넣고 양념해 먹으면 되는 게 비빔국수니까. 매운 걸 잘 못먹는 편이면서도 가끔씩 매콤한 게 땡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생각나는 건 제일 먼저 떡볶이, 라면, 그리고 비빔국수다. 최근 들어 떡볶이 열망이 가장 크긴 했지만 내 머릿속에 각인된 맛있는 떡볶이에 버금가는 맛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다행히 사다가 먹겠다거나 만들어 먹겠다는 부지런함은 자행되지 않았다. 라면은 또 딱 한 젓가락 먹고 나면 이 맛이 아니야 싶은 후회가 들기 십상이므로, 며칠 전부터 깨나 비빔국수가 먹고 싶었던 모양으로 꿈에서도 비빔국수 만들어 먹는 꿈을 꿀 정도였다. 물론 걸림돌은 언제나 귀차니즘. 막상 시작하면 별것도 아니지만 식탐이 요란하게 동하기 전엔 다 귀찮게만 여겨지는 게 먹자고 요리하는 짓이 아닐까.

그럼에도 오늘은 조금 전 밤참으로 혼자 부시럭부시럭 국수를 한줌 삶고 김치를 넣고(귀찮아서 송송썰기도 양념하기도 건너뛰었다) 대신 샐러드용으로 썰어놓은 오이와 파프리카를 좀 얹은 다음 고추장 양념에 썩썩 비벼 후루룩 쩝쩝 먹어주었다. 요즘들어 사람들이 미친듯이 매운 맛을 찾는 이유가 스트레스 해소 때문이라는데, 가학증 환자처럼 통증에 가까운 매운 맛을 즐기는 사람들을 나로선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매운 걸 먹고 나서 화끈거리는 입안을 달래는 기분이 미묘하게 좋다는 건 나도 인정해야겠다. 언짢은 일이 있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밤새 작업하며 계속 기분이 가라앉았는데 부산 떨며 비빔국수를 먹은 걸 기점으로 슬슬 쪼그라들었던 두뇌가 펴지는 느낌이다. 단순히 뭘 <먹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빔국수> 때문인지, 아니면 <매운맛> 때문인지 가늠할 순 없어도 슬슬 식곤증까지 선물로 달고온 오늘의 새벽참 메뉴는 퍽 성공적이다. 남들에겐 오밤중 양푼 비빔밥이나 비빔국수나 생뚱맞고 우스운 건 똑같겠지만서도. 킬킬.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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