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자 일

투덜일기 2009. 7. 28. 16:29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며 생겨난 나의 꿈이자 로망은 번역인세로 계약한 책들이 여러 권 쌓이고 또 그게 모두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 꾸준히 분기별로 쏠쏠한 인세수입을 안겨주는 바람에 몇년에 한번씩은 스스로 안식년을 정해 일년 내내 팽팽 놀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상황이다. 로또 당첨 같은 수십 만부짜리 베스트셀러를 꿈꾸는 것도 자유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건, 평생 로또 한번 사본 적 없는 나의 성향과 별로 맞지 않는 일인 것 같다.
하기야 순전히 번역료 수입만으로 너무도 여유로운 삶을 누리며 안식년까지 향유하는 삶을 자랑하는 번역가 또한 내 주변에선 본적 없으니, 엄밀히 말하면 나의 <로망>도 로또 당첨에 버금가는 헛된 꿈일지 모르겠다. 이 땅에서 번역이란 직업은 대개 일개미나 일벌처럼 노동집약적이고 소모적인 일을 꾸준히 쉬지 않고 해서 추운 겨울을 그저 안온한 정도로만 소박하게 지낼 수 있는 여유만을 허락한다. 유명 번역가치고 저술가든, 작가든, 교수든, 강사든 다른 직업을 겸하지 않고 오로지 번역에만 힘쓰는 이를 보기 힘든 이유도 아마 그런 열악한 조건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십수년째 해마다 최악이라고 일컬으니 도대체 얼마나 더 바닥을 쳐야 부상할지 알 수 없는 출판불황의 상황임에야 오죽하랴. 얼마 전 후배가 진지하게 번역가로서의 내 수입이 홀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은 되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홀벌이 가장으로서 생활비며 아이들 학비며, 사교육비에 노년을 위한 저축까지 책임지는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영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지금 내가 무엇보다 이 직업의 장점이라 여기는 시간과 정신의 자유는 잊고 살아야 할 것은 뻔하다. 불규칙한 수입을 감안하여 엄청난 강도로 쉼없이 거의 <떡 찍어내듯> 번역작업에 매달려야 할 테고, 지금보다 더 빈번하게 하기 싫은 장르의 책들까지 절대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받았겠지. 
더욱이 딸린 식구들 때문에 일터에서 고까운 일도 묵묵히 참아내며 열심히 일하는 가장들처럼 나도 최소한 이렇게 일년째 게으름을 부리며 슬럼프를 운운하지도 못했을 테지. 
안식년 타령을 할 만큼 아직 쌓아둔 인세번역도 많지 않은 주제에 일년쯤 일 안하고 놀 궁리만 파고드느라 어느새 또 코앞으로 다가온 마감일 앞에서 일일 의무작업량을 다시 분배하고 있으려니 참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왜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 원래 게으른 인간의 본성이라고는 해도 매번 이건 참 심하다. 약속 안지키는 인간 싫어하면서 마감일 약속은 밥먹듯이 어기고 앉았는 인간이 되다니. 이번에도 지킬 생각보다 어길 작정을 먼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 하고 있는 책도 그다지 잘 팔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 수년간 쏠쏠한 인세수입을 안겨줄 효녀노릇을 할 거라 기대하며 제발 일이나 하자, 일!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