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만에 처음 평상시에 신을 목적으로 굽이 전혀 없는 낮은 운동화를 장만하고 자랑까지 했으니 내가 매일매일 낮은 신발들만 신고 다녔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매일 외출하는 건 아니지만, 매일 외출을 하는 사람에 비유한다면 일주일에 엿새는 여전히 높은 신발을 신고, 하루만 바닥 신발을 신는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만큼 나 자신조차 집밖에선 높은 굽으로 연장되지 않은 <단신의 삶>이 익숙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긴바지를 입을 땐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어제 저녁에도 아주 잠깐 자주색 운동화를 신고 나갈까 생각하다 결국엔 굽 높은 발가락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지난번에 사진으로도 공개한 하늘색 말고, 산지 5, 6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여름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애용하는 푹신하고 예쁜 밤색 슬리퍼였다. 발가락을 끼우는 디자인이긴 해도 발등을 가로지르는 끈이 넓은 천이라 아무리 오래 신어도 발이 전혀 아프지 않고 게다가 높은 굽임에도 가볍기까지 해서 여름엔 멀리 여행을 갈 때 비행기를 타더라도 그만한 신발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제 그만 홍대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 찰나, 왼쪽 슬리퍼의 발가락 지탱 부분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얼마 전 그 부분의 천이 약간 해진 것을 발견하긴 했지만, 겉에 둘러싸인 플라스틱이 튼튼해보여 올 여름까진 너끈히 신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침 횡단보도 앞 좌판에선 만원짜리 발가락슬리퍼를 팔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굽이 낮았다. 1cm도 안될 정도로... 조금 더 가면 다른 신발가게도 있는 건 알았지만, 굽 높은 발가락 슬리퍼가 망가지니 멀지 않은 거리도 신을 질질 끌고 걷는 건 불가능했다. 마침 거기서 파는 <쪼리>도 밤색이라는데 안도하며 하나 사신고 친구를 만났는데, 10년을 만나왔어도 늘 7, 8cm 굽으로 키를 높인 나만 보았던 친구는 몹시 낯설어 하며 깔깔댔다. 나란히 걸으면 눈높이와 어깨가 한참 아래로 뚝 떨어져 있는 내 단신의 실체를 새삼 느낀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집 밖에서 땅바닥에 붙어버린 개미 느낌으로 사방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내게도 낯선 경험이지만, 민망한 가운데서도 나 역시 상황이 웃겨 계속 킬킬대고 있었다.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길을 걷다가 여주인공의 구두 굽이 똑하고 부러지는 바람에 곁에 있던 남자 주인공에게 업힌다든지, 웬 남자가 뜬금없이 망가진 굽을 고쳐준다든지 해서 사이가 각별해지거나 극적인 전개를 맞게 되는데, 현실은 역시나 전혀 다르다. 홀로 길을 건너려다 돌연 슬리퍼가 끊어져버린 나는 마침 1m 전방에 있던 슬리퍼 좌판에서 만원짜리 슬리퍼를 사 신었고 아끼던 신발과 작별한 것을 속으로 몹시 애석해 하며 가던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도 아끼던 굽높은 슬리퍼가 망가져 전혀 살 생각도 없었던 바닥 슬리퍼를 사 신게 된 것은 어쩌면 생긴대로 살라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면서. 지난 포스팅과 결부시켜 보자면 나는 결국 별것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려는 편의주의 사고에 젖어 사는 사람인 듯하다. 그러므로 갑자기 종류가 늘어난 바닥신발들 때문에라도 앞으로는 낮은 신발을 신는 날이 일주일에 이틀 비율로 늘어날 확률이 높다.
생긴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면 뜬금없이 왜 길바닥에서 슬리퍼가 망가졌겠으며, 하필 또 코앞에서 비슷한 색깔의 바닥 슬리퍼를 팔았겠느냐고 끼워맞추면서 말이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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