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나보다 키작은 사람들은 허리 굽은 할머니들 밖에 찾아보기 힘든 요즘, 반평생 비애를 느껴온 단신의 나로서는 꽤 어려운 결심을 했다. 20년 가까이 낮은 신발을 극구 외면하던 내가 그냥 생긴대로 살자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일괄적으로 높은 굽에 맞도록 길이를 자른 바지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편하게 신자는 발가락 고무 슬리퍼조차 높은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바로 나다.
일괄적으로 높은 굽에 맞도록 길이를 자른 바지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편하게 신자는 발가락 고무 슬리퍼조차 높은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바로 나다.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키작은 십대들이 신는, 앞뒤로 굽이 8cm쯤 되는 운동화를 몇년 전 집 근처 백화점에서 발견하고 어찌나 기쁘던지 지인들의 옆구리를 찔러 생일선물로 받아내선 거의 5년 가까이 애용했다. 그 운동화가 뒤축이 터지고 안감이 해지는 바람에 다른 굽 높은 운동화를 찾아나섰지만, 죄다 뒷굽만 안쪽으로 교묘하게 높여놓은 키높이 운동화가 대세일 뿐 그때 그 운동화처럼 튼튼하고 편한 높은 운동화는 만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키높이 운동화를 사서 신어보았지만 오래 걷기엔 별로 편하지도 않았던 데다 얼마전부터는 겉만 멀쩡해보였지 비만 오면 신발이 새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다시 새로이 굽높은 운동화를 찾아다닌지 어언 넉달. 멍청하게 생긴 속임수 키높이 운동화가 아니고선 예쁘고 편하고 튼튼하고 솔직하게 안팎으로 굽이 높은 운동화는 국내에서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선 3-40불이면 사는 운동화를 구매대행 해서 15만원에 사 신을 순 없는 일!
어영부영 미적거리다 늦봄이 가고 이제는 초여름이구나 생각되는 나날이 다가오자 문득 신발장 안에 상징적으로 남아 있는 신발 하나에 생각이 미쳤다. 근거없이 자신만만하던 사회생활 초기, 첫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이힐 못지 않게 굽이 1cm에 불과한 바닥신발도 자주 신고 다녔다. 신발을 여러개 놓고 번갈아 신는 편이라 어느 것도 잘 닳지 않기는 하지만, 당시에 무척 애용하여 뒷굽 고무는 꽤 여러번 갈아신었음에도 신발장에 20년 가까이 모셔져 있는 그 신발이 여기저기 좀 닳긴 했어도 아직 멀쩡해 보이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더욱이 재질도 가죽이 아니라 나일론 비슷한 천인데... 얼마 전 클림트 전시회를 보러 가는 날, 비 새는 운동화는 괜히 신기 싫고 오래 서 있으려면 편한 신발을 신기는 해야겠고 해서 신발장에 모셔만 두었던 그 바닥 신발을 실로 오랜만에 신고 나섰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개미처럼 움츠러드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동안 교묘히 높은 굽으로 사람들을 속여 오다가 새삼스레 다시한번 나 자신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속 시원해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내게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워낙 큰 키에 하이힐도 모자라 요샌 이름도 무서운 십몇센티미터짜리 <킬힐>을 신고 다니는 꺽다리 여자들 사이에서 초등학생처럼 느껴지는 단신으로 걸어다니는 게 마냥 뿌듯할 수만은 없다. 겉으로는 외모 지상주의를 욕하면서 남몰래 남자들도 구두 안에 키높이 굽을 숨겨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하이힐을 신으면 키도 커보이지만 굵은 종아리도 어쩐지 좀 가늘어 <보이는> 것 같고, 짧은 다리도 길어진 듯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굽으로 높여봤자 여전히 발육 좋은 요즘 젊은 애들과는 길이를 비교할 수 없는 형편이고, 작은 키 못지 않게 작은 발로는 십센티미터가 넘는 킬힐을 소화해낼 수도 없음을 알고 나니 철이 좀 들은걸까. 굳이 발꿈치 아래로 늘어지는 긴 바지를 입을 일이 없는 요즘 날씨 덕분에 간만에 세상을 본 옛날 바닥 신발을 신고 다녀보니 까짓것 더 이상 굽높은 운동화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동안 예쁘긴 한데 굽이 낮아서 외면했던 신발들도 이젠 얼마든지 신어주마 하는 배포(?) 또는 억압되었던 욕망이 샘솟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며칠 전엔 충동적으로 납작한 운동화도 사들였다. 남들이 신은 걸 보며 군침만 흘렸던 끈 묶는 캔버스화는 오히려 눈에 안들어오는 반면, 고무신 같은 재미난 신발이 더 눈길을 끌더라. 운동화 하나 사놓고 또 어울리는 옷과 바지 걱정에 꽤나 낑낑대긴 하겠지만, 그래도 꽤나 뿌듯하다. 생긴대로 산다는 게 이렇게 편하고 좋은 거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고나 할까. 굽이 없으면 오히려 오래 걷기에 나쁘니 어쩌니 말도 많지만, 7,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에 비할까. 조만간 또 나는 땅바닥에서 탈출하려는 단신의 욕망에 꿈틀댈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당분간 원래 그대로의 낮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며 솔직하게 살아볼란다.
어영부영 미적거리다 늦봄이 가고 이제는 초여름이구나 생각되는 나날이 다가오자 문득 신발장 안에 상징적으로 남아 있는 신발 하나에 생각이 미쳤다. 근거없이 자신만만하던 사회생활 초기, 첫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이힐 못지 않게 굽이 1cm에 불과한 바닥신발도 자주 신고 다녔다. 신발을 여러개 놓고 번갈아 신는 편이라 어느 것도 잘 닳지 않기는 하지만, 당시에 무척 애용하여 뒷굽 고무는 꽤 여러번 갈아신었음에도 신발장에 20년 가까이 모셔져 있는 그 신발이 여기저기 좀 닳긴 했어도 아직 멀쩡해 보이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더욱이 재질도 가죽이 아니라 나일론 비슷한 천인데... 얼마 전 클림트 전시회를 보러 가는 날, 비 새는 운동화는 괜히 신기 싫고 오래 서 있으려면 편한 신발을 신기는 해야겠고 해서 신발장에 모셔만 두었던 그 바닥 신발을 실로 오랜만에 신고 나섰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개미처럼 움츠러드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동안 교묘히 높은 굽으로 사람들을 속여 오다가 새삼스레 다시한번 나 자신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속 시원해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내게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워낙 큰 키에 하이힐도 모자라 요샌 이름도 무서운 십몇센티미터짜리 <킬힐>을 신고 다니는 꺽다리 여자들 사이에서 초등학생처럼 느껴지는 단신으로 걸어다니는 게 마냥 뿌듯할 수만은 없다. 겉으로는 외모 지상주의를 욕하면서 남몰래 남자들도 구두 안에 키높이 굽을 숨겨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하이힐을 신으면 키도 커보이지만 굵은 종아리도 어쩐지 좀 가늘어 <보이는> 것 같고, 짧은 다리도 길어진 듯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굽으로 높여봤자 여전히 발육 좋은 요즘 젊은 애들과는 길이를 비교할 수 없는 형편이고, 작은 키 못지 않게 작은 발로는 십센티미터가 넘는 킬힐을 소화해낼 수도 없음을 알고 나니 철이 좀 들은걸까. 굳이 발꿈치 아래로 늘어지는 긴 바지를 입을 일이 없는 요즘 날씨 덕분에 간만에 세상을 본 옛날 바닥 신발을 신고 다녀보니 까짓것 더 이상 굽높은 운동화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동안 예쁘긴 한데 굽이 낮아서 외면했던 신발들도 이젠 얼마든지 신어주마 하는 배포(?) 또는 억압되었던 욕망이 샘솟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며칠 전엔 충동적으로 납작한 운동화도 사들였다. 남들이 신은 걸 보며 군침만 흘렸던 끈 묶는 캔버스화는 오히려 눈에 안들어오는 반면, 고무신 같은 재미난 신발이 더 눈길을 끌더라. 운동화 하나 사놓고 또 어울리는 옷과 바지 걱정에 꽤나 낑낑대긴 하겠지만, 그래도 꽤나 뿌듯하다. 생긴대로 산다는 게 이렇게 편하고 좋은 거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고나 할까. 굽이 없으면 오히려 오래 걷기에 나쁘니 어쩌니 말도 많지만, 7,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에 비할까. 조만간 또 나는 땅바닥에서 탈출하려는 단신의 욕망에 꿈틀댈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당분간 원래 그대로의 낮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며 솔직하게 살아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