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지

책보따리 2009. 5. 15. 15:23

요즘 나오는 책들의 거의 절반은 표지 아래쪽에 띠지를 두르고 있는 듯하다. 주로 주절주절 표지에 인쇄해 넣기엔 민망한 책의 광고문안을 새기기도 하고, 드물게는 <눈먼자들의 도시>처럼 영화 장면을 아주 넓게  인쇄해 양장본 껍질인지 띠지인지 모를 어중간한 형태로 두르기도 한다. 책 아래쪽에만 둘러놓은 띠지는 사실 관리면에선 꽤나 골칫덩어리다. 책을 쌓거나 꽂거나 옮길 때 쉽게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띠지를 두르고 나오는 책들이 많은 걸 보면 추가 비용과 관리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저렴한 페이퍼백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는 예로부터 책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풍습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옛날엔 전 세계적으로 워낙 종이가 귀하고 책이 귀했을 텐데 유독 우리나라만 지금껏 책이라면 무조건 내용과 상관없이 좋은 질의 <아트지> 같은 걸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은 이유를 나로선 알 수가 없지만, 최근 나온 핸디북 크기의 작은 책들도 글씨와 판형만 약간 작아졌지 종이는 여전히 눈부신 수입지라 책 무게는 별로 줄지 않은 걸 보면, 정말 책을 숭상하는 민족이 맞는 것 같긴 하다. 아예 안보면 안봤지 만듦새가 시답잖고 <싼티>나는 책은 안사본다는 뜻 아니겠나.
하기야 습관적으로 책을 소중히 다루고 아끼는 습관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남들은 별 생각없이 버린다는 띠지도 나는 차마 버리지를 못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 줄 알았는데, 새삼스레 동생들한테 책을 빌려주며 한 소리를 듣고나서야 아니란 걸 알았다. 띠지 없는 책들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동생들에겐 띠지의 존재여부가 독서의 여부를 알려주는 표시일 정도란다. 책을 읽게 되면 거추장스러운 띠지를 제일 먼저 버린다나.
물론 나도 책을 읽을 땐 당연히 띠지가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먼저 빼긴 한다. 그러고는 곧장 버리는 게 아니라 이미 접혀 있는 모양대로 약간 양쪽 길이가 다르게 접어선 책갈피로 사용한 다음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띠지를 곱게 둘러 책꽂이에 꽂아둔다. 그러다가 보면 책을 이리저리 빼고 꽂다 가끔 띠지를 찢어뜨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최근엔 그냥 책사이에 꽂아둘 때도 많아졌기는 하지만, 띠지를 함부로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내가 띠지를 안버리고 계속 보관하는 모습이 꽤나 이상해 보였는지 며칠 전엔 정민공주가 물었다. "고모는 왜 저런 책 종이를 안 버리고 계속 갖고 있어?"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대답이 궁해졌던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주절주절 지껄일 수밖에 없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이 저런 종이 조각 하나도 생각 많이 하고 머리 써서 만든 거고, 종이는 원료를 다 수입해서 만들기 때문에 함부로 버리면 아깝기도 하고, 접어서 책갈피로 쓰면 아주 요긴하고....

어쩌면 내가 출판업계에 발을 담그고 생계를 잇고 있기 때문에 책을 더 존중할지 모른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띠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책에 대한 애정이 많다기 보다는 최대한 새것인 채로 보관하고 싶은 겉치레 욕심에 불과한 듯하다. 띠지를 안 버리고 책을 읽은 다음 다시 둘러 두는 짓은 번역 일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반복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하다. 나보다 훨씬 더 책을 많이 읽으시는 블로그 이웃들은 띠지를 어떻게들 처리하시는지. 정말로 띠지에 대한 집착은 나만의 기벽인지. 나말고도 그러는 분들이 또 있는지.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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