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봤다

삶꾸러미 2009. 2. 8. 16:25
중학교 1학년 때, 첫 환경미화 심사를 마치고 나서 무뚝뚝한 담임선생이 말했다. "다들 욕봤다."
<욕을 보이다>는 말이 안 좋은 뜻임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국어선생이었던 담임은 우리의 난감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웃으며 "애썼다는 뜻이다, 이 녀석들아."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 말이 재미 있어서 <수고했다> <애썼다>라고 말을 해야하는 경우엔 일부러 "욕봤다!"라고 외치곤 했다. 영문을 몰라 처음 우리처럼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에겐, "너는 한국말도 못알아듣냐!"라며 담임선생이 우리에게 했던 핀잔을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어제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문득 그 말이 떠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욕봤다.'
오죽하면 인륜지대사라고 하겠냐마는 결혼이란 참으로 피곤하고 거창한 의식임에 틀림없다. 
당신 아들도 아닌 조카 결혼식임에도 울엄마까지 잠 못 주무시고 이래저래 신경을 쓸 정도이니
당사자인 신랑신부는 물론이고 그 부모들까지 오죽 에너지가 소모되었을까.
워낙 예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혼주셨던 우리 고모랑 고모부는 살이 쪽 빠져 안쓰러운 지경이었고
마지막까지 예식을 총지휘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두 남동생이 결혼하는 과정을 지켜보긴 했지만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라 이 나라에서 집안 대 집안의 행사인 결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차가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세세히 신경을 써야 하는지 잊고 있었는데, 새삼 어깨 너머로 또 거들떠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고나길 무대체질이 아니고서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우리 집안의 개혼이었던 큰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소심한 엄마는 결국 크게 병이 나 과연 결혼식에 갈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결혼 예식의 처음은 신랑신부 어머니가 제일 먼저 입장해 양쪽 단상에 있는 초에 불을 켜고 나서 내려와 서로 맞절을 하는 것인데, 울 엄마는 덜덜 떨거나 실수를 해 그걸 제대로 못해내실까봐 겁을 내기도 했다. ^^ 

확실히 인연이란 따로 있는가보다 싶은 선남선녀의 결합이었던 신랑신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결혼식은 최근에 본 그 어느 결혼식보다 화려하고 성대했지만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내 느낌은 늘,  "어휴, 결혼식이란 정말 못할 짓이로구나..."하는 것이다.
큰동생 부부는 결혼식을 너무 얼떨결에 치른 것 같아, 제대로 다시 해보고 싶다고, 그러면 요번엔 아주 잘 할 것 같다고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그리고 더러는 몇년 살다가 리마인드 웨딩이라며 식을 다시 올리거나
간혹 재혼, 삼혼까지 화려한 예식으로 축하받는 이들도 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이지 결혼식이란 너무도 거창하고 무의미한 소비의식이자 자기과시의 장이라
절레절레 고개가 흔들린다. 

아무려나 간만에 무수리까지 하이힐로 마감되는 꽃단장하고서 왕비마마 모시고 다녀오느라 어찌나 욕봤는지  
열세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피곤하다. ;-p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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