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가지치기

삶꾸러미 2006. 10. 15. 01:27
師라는 말도 있으니
(벨로를 위해 읽어주면 '삼인행 필유아사', 셋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 될만한 이가 있다'는 뜻^^;)
언제 어디를 가나 따라 배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한 진리인데
(심지어 몹시 싫은 사람에게도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걸 배우게 되니까!)
오늘은 이십여년 전부터 늘 참 배울 게 많던 친구한테서 아주 중요한 걸 배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의 뇌는 몇년에 한 번씩 지식의 가지치기를 한단다.
미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경로로 주워듣고 눈으로 스쳐
엄청나게 두뇌에 입력된 정보들 가운데서, 뇌의 주인이 최근 몇 년간 그닥 관심을 갖지 않고 기억의 저 너머로 밀어두었거나 관심 밖으로 외면한 정보와 지식들은
쓸데없는 가지 쳐내듯 몇년 동안의 유예기간이 지나면 스르륵 기억에서 잘려져 나간다는 거다.

오늘도 늘 달변이고 박학다식하던 친구의 맛깔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난 요즘 자꾸 바보가 되어가는지, 아니면 홀로 일하는 시간이 많아 대화술이 퇴보하는 건지
사람들과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말문이 막히거나 정확하게 콕 찝어 표현할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리게 되는 바람에, 예전처럼 수다스럽지 않아졌다고 고백한 나에게 친구가 현자처럼 빙그레 웃으며 들려준 이야기였다.
자기도 얼마 전 뇌의 가지치기를 당했는지, 예전엔 몹시 관심 많던 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돌연 해당 낱말들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고 당황하는 바람에,
워낙 같잖아 읽기를 관뒀던 신문도 다시 구독하고, 이런저런 책도 골라 읽는다는 것이었다.

자꾸 뇌에서 꺼내 쓰고 다시 저장해둔 정보들이야 그럴 염려가 없지만
가물가물 기억이 날까말까 하던 얼마 안 되는 지식들은 계속 꺼내 쓰지 않으면 어느 순간 분야째로 뭉텅뭉텅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니!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식충이처럼 살다간 정말 빈 깡통처럼 뇌에서 텅텅 빈 소리만 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아닌가!
그러잖아 요새 머리에 들여보내는 것 없이 계속 뽑아쓰는 소모적인 짓만 하고 있어
불안하던 차에 '뇌의 가지치기' 이야기까지 듣고 보니 더욱 고개가 끄덕여졌다.

글과 말로 먹고 산다는 인간이
제대로 아는 게 하도 없고 무지한 것 같아 뒤늦게 다시 공부랍시고 시작했던 2002년부터 휴학포함 3년 동안엔 그럭저럭 머리에 뭔가를 채워넣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록 뜬구름 잡는 기분이긴 했어도 이런저런 지식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구경이나마 한 것 같았는데, 그 뒤로는 확실히 퇴보하고 있었던 거다.

욕심인지 허영인지 이런저런 책들을 사들여 쌓아놓기는 했으되
제대로 읽고 생각도 해보면서 뇌와 마음의 자양분으로 삼아본지가 과연 언제던가.
하물며 매일 집에서 뒹구는 신문조차도 책 서평이 실리는 토요일자만 찾아보는 게 전부일 뿐 인터넷 접속할 때 잠깐씩 보이는 기사 제목도 휘휘 훑어보는 게 고작이니
온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쓸만한" 정보와 지식에 신경을 쏟아본 기억이 참 아득하다.

조금 비약하자면
이러다 몇년에 한 번씩 대거 가지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50줄에 접어들 무렵
내 두뇌엔 기계적으로 눈과 손가락을 연결해주는 번역 시스템만 남는 건 아닌지
겁이 다 덜컥 난다. 

시방 옮기고 있는 풋풋한 십대의 사랑 이야기의 작업 진도가 지지부진한 것은
결국 내 사랑의 경험이 워낙 오래된 탓에 더하여 ㅠ.ㅠ
감성적인 사랑 이야기를 감미롭게 전할 풍성한 어휘력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던 거다.

다음번 내 두뇌의 가지치기 시기가 오기 전에
바쁘게 이것저것 많이 보아두고 공부하고 느껴 두어야 할 터인데
상당부분 이미 아메바스러워진 나의 기억력은 이 결심만이라도 잘 간직해줄 것인지.
과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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