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가 뭔지

투덜일기 2008. 11. 1. 16:19

얼마 전 머리를 볶았다.
꽤 오래 생머리 형태를 유지했던 듯, "웨이브는 얼마만에 하시는 거예요"라고 묻는 미용사 말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눈을 찌르다 못해 커튼처럼 드리워진 앞머리 때문에, 그리고 산뜻한 기분전환을 위해 선택한
미용실행은 확실히 판에 박힌 지루한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주긴 했다.
가느다란 머리칼을 탓하며 몇번이나 시간을 연장한 <디지털 파마>의 실체는 꽤나 꼬불거려 탱탱한 라면발을 연상시키지만 짤똥한 앞머리와 함께 경쾌해진 분위기에 그날만은 흡족했었다. 문제는 미용실에서 갓 손댄 머리라는 것이 전문가의 손을 탔을 땐 퍽 멋져도 나몰라라 방치하거나 손질을 제대로 못했을 땐 영 아니올시다라는 점이다. 더욱이 요즘은 일주일씩 집에 틀어박혀 지내며 세수도 게을리하는 판국이라 가끔 외출을 할 때도 머리손질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여(그저 후르륵 말리고 왁스만 발라주라 했음에도!) 집밖을 나설 땐 나도 모르게 자라목이 되는 것 같다. 
미적 감각과 눈썰미가 뛰어난 정민공주가 베개에 비벼댄 티가 나는 내 머리를 보고 "고모 머리 쫌 웃기다!"라고 말한 것도 영 찔렸다. 길지 않아 단발에 가까운 길이의 머리를 달달 볶고 앞머리를 가지런히 내려 눈썹 위에서 잘라놓은 내 머리모양을 보며 미용사는 "너무 귀엽지 않아요??"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요즘 머리를 감고 나서 거울을 보면 흡사 한 마리 양을 보는 것 같다. -_-;;

바뀐 머리모양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패션을 좀 아는 지인들(이라고 믿고 싶다)은 대개 칭찬을 해준다. 나와 미용사가 의도했던 대로 "더 어려보인다"는 말도 서슴없이 할 정도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미용사는 자기 작품에 심취되었으니 당연히 마음에 들어 할 터이고, 칭찬을 해준 지인들은 아마 내가 도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왕촌스러운 머리를 하고 나타나더라도 나름의 장점을 찾아내 예쁘다고 해주었으리라는 것을. 그들에겐 이미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10년, 20년된 지기나 선후배들이 가끔 만나서 "하나도 안변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도 같은 원리일 것이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나이들어가는 내 모습에서도 굳이 옛모습을 찾아내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분위기를 기뻐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안목은 또 다르다. ^^;
그분들 눈엔 그간 파마기도 없이 숱없는 머리를 짤막하게 자르고 다닌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들었던지 보글보글 볶아놓은 머리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지난주말에 만난 친척 할머니는 나에게 "얼굴이 좋아졌다. 예뻐졌다. 머리가 달라져서 그런가보다"고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_+
크...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은 이제 이 사회에서 더는 칭찬이 아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잘 안다. 허구한날 밤샘 뒤끝이라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 볼품없는 머리(적어도 어르신들 눈에는;;)를 하고로 나타나던 내가 보글보글 양머리를 하고 나타났으니 기특했을 게다.
그런데 또 울 엄만 마음에 안드는 눈치다. 첫날에 마지못해 예쁘다고 해주긴 했지만, 짤똥한 앞머리를 보며 "웬 정민이 같이 머리를 자르고 왔냐?"고 물었다. 마치 나에겐 안어울린다는 듯이 ㅠ.ㅠ

하지만 도대체 왜 아줌마(!) 나이가 되면 죄다 보글보글 짧게 말아붙인 파마머리를 해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가장 편리한 머리라는 건 나도 잘 안다. 베개에 잔뜩 비벼 새집을 지었더라도 분무기로 물 몇번 뿌리고 쓱쓱 빗으면 용수철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바로 아줌마들의 짧은 파마머리라는 것을.
전적으로 개인취향이긴 하지만 50대 아줌마가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건 또 영 어색하다. 머리칼의 색깔 탓일까? 외국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니 심지어 백발이 됐더라도 길게 어깨 너머로 머리를 기른 모습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데 왜 우리나라 아줌마와 할머니들의  풀어헤친 긴 생머리는 어색하다못해 주책맞게 느껴지는지.
나보다 연배가 있는 친구들의 항변은 그렇다. 나이가 들면 머리칼에 탄력이 떨어져 생머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단다. 푸슬푸슬 바스라질 것 같고 숱도 없는 생머리보다는 그래도 달달 볶아 놓으면 풍성해보이기라도 한다나.

어쨌거나 억울한 건 이번 나의 <웨이브 파마> 선택이 순전히 가을맞이 기분전환용이었을 뿐이며
절대로 내 나이에 걸맞은 머리모양을 선택한 게 아님에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어젠 마트에 장보러 갔더니만 내 뒤통수에 대고 "어머니! 오늘 대하가 좋습니다"라고 비닐 앞치마를 두른 청년이 외쳤다. 차라리 아줌마가 낫지, 마트 고객을 대놓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서비스 정말 싫다!
요새 비혼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파마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생머리로 다닐 땐 그 마트에서 <어머니>라고 불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마음 상했다.
나이를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생각은 하지만 연령주의에 사로잡힌 이 사회에서 나 또한 동안을 추구하고
노숙해보인다는 말보다는 어려보인다는 말이 좋다.
20대 직장인시절 사진을 보면 옷차림만으론 거의 40대로 보일 정도로 각 잡힌 정장을 입고 다녔는데
요샌 오히려 만날 티쪼가리에 청바지, 편한 재킷이면 만족이다.
그나마도 출판사에 갈 땐 꽤나 단정히 차려입으려 노력했던 것도 귀찮아서 관뒀다. 출판사는 그나마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대부분이지만 숨막히는 사무실 공기가 싫어서 담당자를 밖으로 불러내 만나는 것이 더 좋아졌고, 출판계 지인들도 그 편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첫만남에서 성실한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도 사라졌다. 예전과 비교하면 마감일 어기기 대장이 되었다고 반성하고 있지만, 나 정도면 사실 양반이란다. 한두달 늦게 원고 넘기는 건 애교스러울 정도라나. (그러나 1년 넘게 질질 끄는 원고도 있다는 걸 그 사람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ㅋㅋ) 

오늘도 앞머리를 실핀으로 질끈 올려붙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면 피식 웃음이 난다. 2주가 다 돼가는 이놈의 양머리에 아직도 적응이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웃겨서라도 미소를 주는 이 머리를 재빨리 펴거나 잘라버릴 생각은 없다.
이건 절대로 아줌마 파마가 아니란 말이지!
어디까지나 양머리 파마다, 양머리!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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