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대신 살림을 하면서 웬만한 음식들은 별 두려움 없이 척척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설거지는 워낙 요리보다 즐기던 거라 별 어려움이 없는데 역시 난관에 부딪치는 부분은 정리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오징어 볶음을 해먹었다고 치자. 일단 접시에 덜어 한끼니를 먹고 나면 당연히 남는 양이 있기 마련.  남은 음식을 뚜껑있는 보관용기에 넣으려고 할 때 난 왜 그렇게 음식 양에 <딱맞는>통을 짐작하지 못하는지.
무쳐놓은 나물이 통에 비해 엄청 많다고 느껴져 다른 그릇을 찾아들면, 엄마는 살림의 고수답게 넘치지 않게 통에 들어갈 테니 염려 말고 담으라고 하시는데 그 말은 늘 옳다.
그래서 또 많아 보이지만 다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관용기를 고르면 턱도 없이 작을 때가 많다. 한 마디로 눈썰미가 형편없고 크든 작든 공간감각이 부족하다는 얘기.

이번 이사 때도 그랬다.
작업실에 책이 얼마 없다고 생각했지만, 옷장 안에 두겹으로 겹쳐놓은 책들과 종류별 크고 작은 사전까지 챙기니 얼추 네박스나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똑똑한 사람 같으면 책의 권수를 세어, 버린 책의 권수와 따져보고 필요한 책꽂이 공간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멍청한 나는 책꽂이 선반을 세 개나 비웠으니 대충 책이 다 들어가겠지... 라고만 짐작했다가
이삿짐을 옮겨 박스를 풀고 나서 또 다시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_-;;

그래서 책 둘 장소 때문에 이번에 뒤늦게 또 대거 내다버린 것들은 비디오 테이프.
옛날에 중고 비디오 가게를 기웃거리며 사들인 테이프들은 그나마도 많이 버리지 못했고^^;;
dvd를 사두기 훨씬 전에 열심히 공테이프에 녹화해두었던 ER 시리즈,
케이블 영화채널 주간편성표를 들여다보며 한참 예약녹화에 힘쓰던 시절에 만들어둔 이런저런 영화 복사본들,그리고 EBS 세계의 명화와 명작드라마 자막번역한 영화들은 최대한 추려내고 다 내다버렸다.
3년간 들춰보지 않은 건 앞으로도 들여다볼 확률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몇편은 교육적인 EBS용으로 편집하지 않은 걸로 소장해두고 싶어서... (라지만 몇년 뒤엔 또 미련 없이 다 버리게 될 것 같다 ㅋㅋ)

내내 마르고 건조하던 날씨가 꾸물꾸물 흐려져 난데없이 비를 뿌리던 지난 토요일 오전.
드디어 나의 <자기만의 방> 시대는 막을 내렸고, 온몸을 근육통에 시달리며 또 다시 이틀 꼬박 이리저리 옮기고 내다 버리고 쑤셔넣어 정리를 했건만, 그럭저럭 제 모습을 찾은 건 마루와 자는 방뿐이다.
첫날엔 큰 집기와 책들만 대충 꽂아두고 엄두가 나질 않아 엄마방에서 자야 했을 정도.
작업실에선 그리 커보이지 않던 책상은 원래 컴퓨터 책상이 있던 자리에 놓이지 않을 만큼 길었고, 그래서 애써 자리를 잡아 옮겨 놓았던 책장은 또 다시 맞은 편 벽쪽으로 옮겨놓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또 다른 살림의 이동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크게 힘쓰는 일은 막내동생이 다 해주긴 했지만, 버리기와 정리 과정은 계속해서 고된 노동이었다.
아직도 컴퓨터방은 여전히 폭탄 맞은 상태. 면벽하듯 모니터를 대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여전히 CD박스, 정리하지 못한 가방들, 사진, 문방구가 가득 든 종이백들이 방바닥에 널려 있다.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정리를 마치리라 마음 먹고 동사무소에 가서 대형폐기물 신고를 했는데, 크헉 소파는 무려 만원이나 한단다. 버리는 게 수월하지 않음을 상기시켜주듯 소파와 책상, 의자를 버리는데 드는 비용이 만육천원. 
알량한 작업실 살림 이사하면서, 삶은 단출하게 꾸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계속 얻고 있다.
앞으로는 쓸데없는 욕심 줄이면서 검소하게 살아야지.

(아 근데, 구매대행사에 주문한 '검정가죽'가방은 왜 안오는 걸까...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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