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투덜일기 2008. 9. 19. 03:04

청소와 정리.
운동과 더불어 내가 제일 못하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연휴 이후 매일 청소와 정리에 힘쓰느라 컴퓨터 앞엔 거의 엉덩이를 붙일 새가 없었다.
20일까지 작업실을 비워주기로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림의 대이동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만의 방>에 대한 미련이 워낙 질기기도 했지만, 30년 가까이 이사라고는 해본 적 없는(작업실 시작할 땐 다 사들여 배달시키면 됐기 때문에 공식적인 '이사'날 나는 커피와 커피메이커와 머그잔 몇 개 든 비닐을 달랑 들고 입주했었다)  내가 트럭을 부르고 이삿짐을 꾸려 살림을 옮기는 어마어마한 일을 실행하는 것이 두려워 그토록 우유부단하고 미련맞게 쌩돈을 허비했구나 싶다. 옮길 짐이라봤자 소파랑 책상, 책 몇 박스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 짐도 그보다 크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이사' 스트레스 지수가 거의 '배우자의 죽음'에 이를 만큼 높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하는 중이다.
계산 상으로는, 집에서 쓰던 컴퓨터 책상과 오래된 소파를 버리고 작업실에 장만했던 책상과 소파를 들여오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일단 내가 쓰는 마루에 있던 소파는 2인용이고 작업실 소파는 3인용이니 공간이 더 필요하고, 작업실 옷장에 들어 있던 책을 꽂을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마루에 있던 큰 책장과 방에 있던 낮은 책장의 위치를 바꿔 소파 놓을 공간을 일단 확보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작업실 옷장에 들어있던 책을 꽂을 공간이 새로 마련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서 이참에 몇년에 한번씩 하는 <책버리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책은 잘 읽지도 않는 주제에 또 폼 잡는 건 좋아하니, 탐서가랍시고 책 욕심은 좀 많은가.
그나마 요샌 마구 사들이는 책은 좀 줄었지만 출판사에 갈 때마다, 또는 출판계 지인들이 주섬주섬 챙겨주는 책을 얼씨구나 받아와 여기저기 쌓아두곤 언젠간 다 읽어보리라 마음 먹지만 절반 쯤은 먼지만 쓰고 처박혀 있기 일쑤다.
이왕 버릴 책이라면 도서관에 기증하면 좋겠지만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그렇게 기특한 수고를 도맡을 리는 거의 없다. 지난번에도 도서관이든 하다 못해 대여점에라도 갖다주는 게 폐지로 팔려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엔 귀찮아서 그냥 끈으로 묶어 집앞에 내놓고 말았었다.
이번에도 책장 한번 들춘 게 전부인 새책들을 대거 묶어 내놓으니, 엄마는 자꾸 잔소리를 하며 잘못 내놓은 게 아닌가 확인을 하셨다. 오래 두어도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얻어온 새책들과 왜 굳이 사서 읽었는지 모를 책들까지 40여권을 추려내 버렸지만 그래도 책꽂이는 마냥 부족한 형편.
결국 엄마네 마루에 있는 책장까지 침범해 오래 된 아버지 책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무던히도 인내심을 발휘해 도전했다 포기하기를 수차례 거듭하며 읽었던, 책등이 누렇게 변한 세로판형 삼국지 양장본 같은 책들은 버리기가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눈 질끈 감고 내놓았다.
대체 왜 사셨는지 모를 거대한 판형의 10권짜리 총천연색 세계여행안내서도 내다버렸다.
백권도 넘는 책들을 추리고 묶어 내놓는데만 꼬박 반나절이 걸린 것 같은데, 어설픈 체력은 그 노동만으로도 나가 떨어질 지경이었고 추석 연휴 때 섭취한 영양분이 다 빠져버렸다.

꼬박 이틀간의 집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작업실에 나가보니, 별것 없다고 생각한 그곳 살림살이도 만만치가 않았다. 집기 손상은 책임 못 지겠지만 힘센 인부들을 동원한 최저가 이사비용을 장담한 막내동생에게 이사를 맡기려니 포장 과정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컵과 잔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부엌 살림만 두 박스를 챙기고 나니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책정리를 앞두고는 달콤한 과자와 커피를 헐레벌떡 먹고 마셔야 했다. 

작업실 살림은 최대한 단출하게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버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 챙겨둔 책상 서랍속의 카드, 편지, 탁상달력은 버릴까말까 오래 고민하다 일단 그냥 벌려두고 철수했다.
정리는 못하지만,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건 꽤나 과감히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듯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이 정도 소규모는 이사랄 것도 없지만, 이사는 곧 <버리기>라는 걸 깊이 실감하고 있다.
이제 이틀만 더 버리기에 힘쓰면 끝.
본격적인 이사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삭신이 쑤시고 아프다. 어휴.

포장이사를 하면 또 다르긴 하겠지만, 나 같은 인간은 2년마다 한번씩 이사다니며 부동산 늘려 부자될 생각 꿈도 못꿀 것 같다. +_+
(처음 글을 쓸 땐 이런 결론을 내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간만에 글을 쓰니 완전 갈팡질팡이다 ㅋ)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