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

투덜일기 2008. 8. 27. 23:41
며칠째 이가 아프다.
절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 썩고 있는데도 오래도록 방치한 사랑니가  드디어 세상과 내 입안에 작별을 고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엔 하루쯤 욱신거리다 잠잠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멈출 기세가 아니어서 계획대로라면 드디어 내일 치과에 가서 어마어마한 공사를 시작해볼 작정이다. 웃을 때마다 위아래로 금니를 번쩍거릴 순 없다며 상아재질로 십수 개(!)의 충치를 떼워놓고 방치한지 13년이 된 나로서는 과연  견적이 얼마나  몹시 두렵다.

이가 아프니 먹고 씹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생각하고 대꾸하는 것도 여의치가 않은데 그래도 약속대로 덕수궁엘 나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청앞엔 범불교도 대회 때문에 교통이 통제되어 버스에서 내려 서대문부터 걸어야 했다.
촛불집회 때 시청부터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가듯 걸어가며, 교통 통제된 버스 안에 갇혀 짜증을 부리며 욕설을 퍼붓던 시민들과 똑같은 심정은 아니었지만(짜증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게 옳다) 어쨌든 불편했고 늦어버린 약속시간 때문에 지인들에게 미안했다.

다행히 집회는 얼추 끝난 뒤였기 때문에, 전시 보는 내내 시끄러운 방송음이 들리면 어쩌나 염려했던 건 기우였고 단체로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챙 넓은 밀집모자를 쓴 스님들의 행렬을 정동길에서 마주쳤을 땐 신기해서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지만 당연히 참았다.

그런데 정동길 끝에선 어떤 아줌마와 아저씨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목에 건 이름패로 보아 범불교도 대회에 참여했음이 분명한 젊은 아줌마(어쩌면 내 또래일지도 모르겠다)는
내가 곁을 지나는 순간, 젊은 아저씨에게 "내가 빨갱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웅얼웅얼 뭐라고 대꾸했는데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고, 여자는 다시 "정부가 잘못하는 일을 지적만 해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사회가 그럼 옳은 거냐?"고 되물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떼거리로 체포된 인사들의 이름이 신문에 나고, 여간첩이 잡혔다는 게 속보로 나오며 걸핏하면 <빨갱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금이 정말로 2008년인지 의아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 한달치 걷기를 했던 데다 전시장을 뺑뺑 도느라 다리가 아팠던 우리는 덕수궁을 나와서 이어지는 약속장소인 안국동까지 이왕이면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셋이서 기본요금이 나오기 십상인 거리에 택시를 타면 욕을 먹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택시도 눈치보며 타야 하는 상황이 버럭 짜증이 났다.
물론 시청앞에서 택시는 쉬 잡히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배고픔에 괴로워하며 뚜벅뚜벅 안국동까지 걸어갔다.

청계천을 건너며 우리 앞을 거의 막아서다시피 팻말을 몸에 걸고 다가오는 1인시위자가 있었는데 팻말엔
<대운하 건설을 적극 찬성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예정지에 땅이라도 사놓으셨나보군요, 라고 피식 웃으며 그 사람을 지나쳤지만 또 치통이 도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봐 염려하며 한달짜리 유럽 여행 일정을 짜는 지인들에게 캐캐묵은 경험담을 조언이랍시고 전하며 고질병처럼 역마살이 춤추는 걸 느끼기는 했지만, 요즘 같아선 어디론가 떠났다가 정말로 안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제풀에 주저앉는 나를 발견하고는 조금 슬펐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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