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투덜일기 2008. 6. 24. 12:29


대체 어쩌다가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주거공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거동 불편한 엄마 때문에 동생네 아파트에서 일주일째 얹혀 살면서 앞으론 나도 이런 공간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새삼 마음을 열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애정이 생기질 않는다.
집값과는 전혀 상관없다지만 북한산을 끼고 있는 위치 때문에 동생네 아파트는 공기도 청량하고 몇 걸음만 옮기면 경치 좋은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수도 있으며, 조경 잘 된 아파트 단지가 으레 그러하듯 솔직히 우리집보다 주변에 나무도 많다. 그뿐인가, 넓은 주차공간은 명절때마다 친척분들이 골목골목에 차 세우느라 골치거리인 우리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쓰레기 배출 요일과 상관없이 지저분한 쓰레기를 내놓는 얌체들 때문에 골목 어귀가 지저분할 때가 많은 우리 동네와 달리 당연히 주변도 깨끗하다. 14층이나 되는 높은 곳임에도 무시무시한 계단 대신 경쾌한 안내 멘트가 나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면 그만이니 아직까지 걸음 부실한 엄마에게도, 계단 공포증 환자인 나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다. (일단 정전이나 엘리베이터 고장의 경우는 염두에서 제외하자)
그러나 이렇게 아파트의 장점을 모두 주워섬겨보아도 나의 문제는 콘크리트 괴물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듯한 아파트 단지가 나를 옥죄는 것 같다는 폐쇄공포증을 느낌과 동시에 발가벗겨져 거리에 내던져진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눈이 나쁜 편인데도 주방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려면 건너편 아파트 거실에서 빨래를 너는 아줌마나 장난감 말을 타고 노는 아이가 보인다. 그렇게 얼핏 들여다보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살림살이는 놀랍도록 똑같다. 왼쪽 벽엔 소파가 있고, 오른쪽 벽엔 TV가 놓여 있고 그 가운데쯤엔 식탁 한 귀퉁이가 멀찍이 보인다.
수십층 빌딩에서 층층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책상에 앉아 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회의를 하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절반 이상 유리로 된 건물의 건너편에서 재미있다 여기며 한참을 구경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 편히 쉬는 공간에서도 층층이 내 위와 아래에 사람들을 이고 깔고 지내야한다는 것이 왜 이리 불편할까. 물론 여행지에서 콘도나 호텔에서라면 수십층 겹겹이 쌓인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잠들고 깨어날 수 있었다. 왜냐고? 그곳은 <여행지>였으니까. 얼마쯤 지나면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마음 밑자락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간혹 잠자리가 설어 선잠을 자는 며칠이 이어진다 해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동생네서 지내는 기분도 딱 여행온 느낌이다. 병원짐을 담았던 여행용 트렁크가 방 한구석에 놓여 있기 때문만은 절대로 아니다. 처음엔 여기서 지내는 불편함이 낯선 잠자리와 더부살이의 부담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올케가 아무리 잘해주고 편히 대한다 해도, 익숙한 내 물건들이 거의 없는 공간에서 내집처럼 편할 수야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기묘한 불편함은 잠잘 때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고, 조카들이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올케는 볼일을 보러 나가, 낙상 사고가 나기 전의 모녀가 살던 우리 집에서처럼 온종일 쿨쿨 잠만 자는 엄마와 나뿐인 상황에도 막연한 답답함과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물론 여행이 아니므로 여행이 주는 즐거운 설렘과 흥분 따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편함을 견디기가 더욱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드디어 이따가 집으로 돌아간다.
계단이 소름끼치더라도 일단은 집에 가면 반갑고 편하고 숨이 잘 쉬어질 것 같다. -_-;;
어쩜 이렇게 촌스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이지 아파트란 공간은 내 마음에 차질 않는다. 계단 많은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오긴 해야할 터인데, 아... 어떡하지.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계단은 무섭고, 아파트는 싫고, 한옥을 장만하기엔 돈이 턱없이 모자랄 테고...
아 젠장.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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