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그 방

삶꾸러미 2008. 5. 5. 00:09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인 5월이 시작되었지만, 가정의달이기도 하기 때문에 계속 슬픔이 따라다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버이날 선물을 뭘로 할지 두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절반으로 줄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다 살아계실 때 어버이날 부담이 네 배, 다섯 배였어도 오히려 좋았던 것처럼 상실과 부재의 크기는 현실적인 편리함과 결코 비교할 수가 없다.

5월의 첫 포스팅은 뭔가 행복한 것으로 하고 싶었는데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도 생각나는 쓸 거리는 죄다 우울한 푸념이나 울분의 토로밖에 안될 것 같아 며칠 전 볕 좋은 날 잠깐 작업실에 나간 김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만의 방 모습을 블로그에도 담아두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내 살림과 남의 살림을 주제로 달랑 두 장 찍어와서 올리려고 지금 보니 사방을 다 찍어올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음에 가면 입구쪽이랑 그저 새하얗기만 한 붙박이 장쪽도 찍어와야지. =_=

유복한 어느 선배가 분양받은 오피스텔처럼 한쪽 벽면에 질좋은 나무로 책장을 짜넣어 책을 빼곡히 꽂아넣지도 못했고, 호수나 강이 내다보이기는커녕 창밖 경치는 빨간 벽돌로 지은 다른 건물이 전부이며, 화분은 10개쯤 죽여 내보냈고 남은 화분도 누렇게 마른 잎들이 불쌍하게 매달려 있으며, 완전히 내 소유도 아니라 처음엔 못을 박고 액자를 걸어도 될까 소심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작업실에 나가 앉아 있으면 단출한 살림살이 속에서 비로소 세상과 마음껏 단절될 수 있다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4년전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 나만큼이나 좋아했던 지인들은 아직도 <작업실로 한 번 놀러갈게>라고 벼르다 서울 귀퉁이에 있는 나만의 방에 찾아와 차 한잔 마시는 게 마치 남들 모르는 예쁜 카페 하나 찾아 놓았다가 아주 가끔 가보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 골목 구석의 인적 드문 카페가 영 장사가 안되는 바람에 문을 닫는다고 하면 몹시 섭섭한 마음이 들듯, 내가 작업실을 포기할까 고민하는 걸 알고 그들도 덩달아 마음이 씁쓸하다나.
나만의 방과 유럽여행을 바꿀 것인가의 결정은 우유부단한 마음속에서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중이고, 만날 적자만 내면서도 어거지로 손님 없는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처럼 나도 씁쓸한 웃음 지으며 4월분 관리비 청구서를 집어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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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림>을 주제로 찍은 사진인데 창문 옆에 붙어 있는 건 비상시에 몸에 묶고 뛰어내리라는 밧줄이 들어 있는 하얀 플라스팅 상자이므로 유일하게 내 살림이 아니다. 그래도 뚜껑에 샤갈전 팸플릿을 붙이고 위에 밤의 카페 테라스 액자를 올려둔 건 내 소행임.
오후 햇살이 저렇게 비쳐드는 걸 보면 서향이란 얘기다. 누렇게 잎이 말라 몰골이 형편없긴 하지만 화분에 햇살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블라인드는 늘 걷어놓고 다닌다. 소파가 햇빛에 허옇게 바라든 말든...
2년 전엔가 출판사 부탁으로 dmb방송에 나가는 책소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작업실이라니까 책꽂이 앞에서 촬영하면 되겠다고 자기네 마음대로 생각했던 담당 pd가 와서 보고는 작업하던 책 말고는 다른 책이 한 권도 안보이는 작업실 몰골에 살짝 난감해 했다. ;-p
몇권 안되는 책들은 그나마도 붙박이 옷장에 숨어 있는데, 수십년 가까이 짐으로 빼곡한 옛날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이 공간에 별로 짐이 없다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
(그렇지만 제버릇 못버리고 책상위는 늘 어지럽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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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건물주인이 원래 장만해놓은 <남의 살림>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렇지만 전자렌지와 설거지 건조대, 커피메이커, 의자는 당연히 내 살림. 4년 넘게 저 주방에서 해먹은 요리는 라면이 유일하고 드럼 세탁기는 딱 한 번 써봤다. *_*
게을러서 컵을 있는대로 다 꺼내놓고 쓰다가 더는 쓸 컵이 없어지면 설거지를 하는 편이라 매일 출근할 때는 싱크대가 늘 만원이었는데... 간만에 나가 컵들이 건조대에 쌓여 있는 걸 보니 어째 버려진 자식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걔네들은 더러워진 채 개수대에 켜켜로 쌓여 있을 때 버려진 느낌일 텐데)

또 언제 나가게 될지 몰라 갈 때마다 화분에 물을 잔뜩 주고 오는데, 주인 잘못 만난 화분들한테 노상 미안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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