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을 해보겠다고 작심했을 때, 막연한 내 바람과 달리 초보자로선 출판계쪽 번역일을 맡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당연히 겁에 질렸고 과연 잘한 짓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때 마침 친구가 솔깃한 얘기를 했다. 애송이 띠동갑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오빠 때문에 걱정스러워서 둘의 사주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겠냐는 것. 신내린 무당이 치는 <점>과 달리 사주는 <나름> 통계와 과학을 근거로 한 것이라며 꼬드기는 친구의 말에 못이기는 척 따라가며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난생처음 내 운명을 점치러 가면서 나는 심장이 꽤나 두근거렸다.

그날 킥킥거리며 귀담아 들었던 나의 사주풀이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은 당연히 그해 독립해서 사업(?)을 시작할 운세라는 것과 글로 먹고 사는 직업이 내 적성에 맞는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니 당분간 백수생활을 이어가며 차츰 살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막연한 방향만 잡아놓은 상태에서 누군가 <그게 니 운명이야>라고 힘주어 말해주니, 사주니 점이니 하는 거 다 미신이라고 여기면서도 어찌나 힘이 되던지 한 1년은 자투리 같은 일만 하며 준백수로 살아도 거뜬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사주보는 아저씨에게 또 한 가지 아주 신나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은 나에게 <역마살>이 있다는 얘기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역마살은 계속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오긴 하는데 조금 지나면 또 엉덩이가 들썩거려 떠나고 싶어지는 쪽이라나.

해마다 어느 시점이 되면 꼭 바다가 보고 싶어 몸살이 나고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도 다 내 운명이라는 훌륭한 핑계를 얻게 된 나는 그 때부터 기회만 되면 떠나는 삶을 꿈꾸며 살았던 듯하다. 적금따위는 평생 들어본 적도 없으니 원고료가 들어와 통장에 조금만 돈이 모이면 어딜 갈까 마음이 설렜고, 다양한 여행지를 경험하진 못했지만 1, 2년에 한번씩은 <재충전용>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아 여행을 선언했다. 멋진 휴가를 꿈꾸며 일년 내내 열심히 번다는 외국인들의 삶이 곧 진리라고 여기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내 인생의 모토로 삼기도 했다. 통장잔고가 바닥나도록 여행에서 돈을 톡톡 털어 다 쓰고 돌아오면 불안감보다는 "또 열심히 벌어서 여행가야지!"라는 동기부여가 더 컸다. 남들에겐 대책없고 한심해 보일지라도 나에겐 행복하기 그지없었던 그런 삶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3년 전엔가 엄마가 쓰러져서 오래 병원신세를 지고 그 뒤로 좀처럼 반짝 건강을 회복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작년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이제 크든 작든 여행을 떠나려면 어린아이 맡기듯 엄마를 동생들에게 맡기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상황에도 내 역마살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질 않고, 다만 짜증스러운 현실에 몸부림을 칠 뿐이다. -_-;; 계획대로 제주도로 떠난 지인들이 보낸 위로용 바다 사진과 메시지를 받은 순간 충동적으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지금 그 터무니 없는 생각으로 마음이 마구 설렌다. 밀린 원고고 뭐고 다 젖혀두고 작업실을 처분해 그 돈으로 유럽으로 날아가 돈 떨어질 때까지 한 달 쯤 편하게 여행다니다 올까보다 하는 생각이다. ㅋㅋㅋ

오래 전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연간 5백 파운드의 고정수입이랑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5백 파운드면 꽤나 큰돈이어서 남편이나 가족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처음 내가 작업실을 마련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5백파운드 대신에 나는 <계약금>과 <원고료>를 받을 수 있으니 가족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생기면, 비록 글을 쓸 능력은 안되더라도 더 열심히 훌륭한 번역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벌써 10개월째 거의 비워두고 있는 작업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미적미적 망설이는 이유도 처음 내 능력으로 확보한 <자기만의 방>의 의미가 퍽이나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 자유의 공간을 포기하고 한달만에 보증금을 다 까먹을 생각을 겁없이 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하하.
그런데 생각할수록 유쾌하다. 작업실 재계약일이 지나서 일년은 또 묶여 있어야 하는지 마는지 현실적인 상황도 알아보기 전에 나는 벌써 파리엘 다시 갈까, 이탈리아와 그리스엘 갈까, 아님 프라하나 스페인엘 갈까 뭐 이런 꿈을 꾸며 벌벌 웃음을 흘린다.

놀랍게도 지금까지는 만약 작업실을 포기하게 되면 그 돈을 정기예금에 넣어야 하나 위험하게 펀드를 들어야 하나 아니면 기회 닿는 대로 다시 장만해야 되니까 입출금 통장에 그냥 넣어두어야하나, 뭐 그런 경우의 수만 생각했지 홀라당 까먹고 놀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에, 억눌렸던 역마살의 발현은 지금 내게 거의 발상의 전환 수준으로 뿌듯하다.

그런데 남은 문제는...
역시나 가장 어려운 가족의 굴레다. 새삼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혼자임을 즐기는 인간인지 깨닫게 된다. 이런 내가 어려서 실수로라도 가족을 꾸렸으면 참 큰일냈겠구나 싶다. 지금 내가 꿈꾸는 건 분명 <가족여행>이 아니라 홀로 떠나거나 친구와 떠나는 여행이다. 자기만의 방과 홀로 떠나는 단기 여행을 바꾸려는 나는 과연 제정신인가. 생각 좀 해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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