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

삶꾸러미 2008. 4. 11. 20:13
날씨마저 암울한 것이 전조가 좋지 못했던 총선날 투표 마치고 결국 동네 벚꽃길에 구경갔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금세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딸이랑 꼭 꽃구경을 해야한다는 엄마 원을 풀어드려서 조금 속이 후련.

그날 비가 내려 꽃이 다 떨어지겠다 걱정했더니 빗줄기가 그리 세지 않았는지 본격적인 벚꽃 축제는 오늘부터라면서 엄마는 또 과일 싸들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다녀왔다는데, 청사초롱에 불 들어오고 현란한 조명이 켜지는 밤에 더 볼것이 있다면서 여전히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본다. -_-

생각해보건대, 예로부터 봄이면 아줌마들이 관광버스 대절해서 버스 뒤집히도록 춤을 추어대면서
꽃구경을 다녔던 이유는 지난한 삶에서 약간의 일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과 계절의 변화에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계절 중에선 언제나 봄이 제일 좋았고 봄꽃 피면 싱숭생숭 놀러나갈 궁리를 하기는 했으며 꽃을 유독 좋아하기는 하지만 계절따라 바뀌어 피는 꽃 하나하나에 진지한 의미를 두고 관찰하게 된 건 삼십대 이후였던 것 같다.

울 부모님이 사십대이셨을 때는 부부동반으로 근교 산에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셨는데
다른 때는 몰라도 산에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 능선이 있는 북한산인가 도봉산인가, 암튼 기억도 잘 안나는 산에 우리 삼남매를 데려가 꼭 구경시켜주고 싶어 하셨다.
꽃이 얼마나 예쁜지 니들도 꼭 봐야 한다면서...
그때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던 막내는 맥가이버 봐야하는데 등산 때문에 늦어 못본다면서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따라다니다 결국 시무룩한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동생녀석 뒤에 아련하게 피어 있는 진달래가 참 예쁘긴 하다.

사실 그때는 부모님을 <한번 봐드린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등산엘 따라나섰는데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걷기조차 싫어하는 내가 진달래 핀 봄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았겠나 싶다.  

엄마는 이제 등산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멋진 등산화를 신고 동네 앞뒷산을 조금 오르다 마는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봄꽃이 피면 꼭 그걸 나한테 못 보여줘서 안달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얼마나 예쁜 줄 아니. 사람들이 다 와서 보고 좋다고 난리더라. 그러니까 너도 봐야지."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알 수 있는 마음은 확실히 나이와 비례하는지
나는 아직도 엄마만큼 봄꽃구경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후회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엄마랑 많은 걸 함께 누려야한다는 조바심은 확실히 생겼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먹다가... 해마다 꽃구경을 빠뜨리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때가 오겠지 싶어서 마음이 묵직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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