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의 사건

투덜일기 2008. 3. 24. 21:50
온종일 비가 내렸던 어제와 달리 햇빛이 쨍하고 얼굴을 드러낸 월요일.
바람이 좀 불기는 했지만 자전거 타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 같았다.

내가 자전거를 장만한 목적은 여러가지였다.
첫째, 여실한 본인의 운동부족 타파.
둘째, 매일 햇빛 쪼이기가 필수적임에도 혼자선 좀처럼 대낮 산책을 꺼리는 왕비마마를 이끌고 운동 나가기.
셋째, 길이 좀 험난하기는 하지만 편도 4km에 불과한 작업실까지 자동차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하여 휘발유 절약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에 동참. -_-;;
넷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토룡마을 자전거모임 참석 ^^
.
.

그리하여...
몇년만에 한번씩 오랜만에 꽤 오래 자전거를 타도 큰 무리는 없었던 <젊은 시절>의 나(생각해보니 모두 2, 30대였더군)를 과신했던 나는 겨우 첫날인 주제에 위 목적 가운데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내 공간으로 얼마나 더 남게 될지 알 수 없는 작업실에 하루라도 더 나가 일하자는 생각에
가방을 챙겨들고 (배낭이 아니라 크로스백을 무겁게 둘러맨 것부터 실수였음)
엄마를 독촉해 일단 집앞 산책로로 내려가 느루를 달려보니 거침없이 페달이 밟혀 작업실 아니라
한강까지라도 단숨에 갈 수 있을 <듯> 했다. -_-;;



위험하게 작업실까지 가는 건 무리라며 큰 걱정을 해대는 엄마에게 도착하자마자 전화할 터이니 걱정 마시라고 큰소리를 뻥뻥 친 나는 드디어 산책로를 벗어나 도로로 올라와 인도에서 살살 느루를 몰았다.
그러나... 좁은 인도에 오가는 수많은 초등학생과 행인들 때문에 계속 자전거를 타는 것은 무리였고
상당부분 그냥 끌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일방통행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아뿔싸... 처음엔 신나게 기어를 변속하며
오를 수 있었던 야트막한 언덕이 끝쪽엔 급경사라 하는 수 없이 다시 느루에서 내려 끌고 올라가야하는
형편이었고, 차로 다닐 땐 그저 완만하게만 느꼈건만 꽤나 가파른 언덕의 울퉁불퉁 좁은 인도에서
느루를 끌고 내려오자니 목표까지 절반도 못 간 지점에서 이미 내 욕심이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곧장 다시 집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좋았는데...
사람 많은 데선 느루를 끌다가 다시 인적이 드문 곳에선 느루를 타고 달리다
가파른 집앞 언덕에선 당연히 느루를 끌고 끙끙 헉헉거리며 올라오려니...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 모퉁이를 돌 무렵엔 숨이 너무 차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을 듯했다.
집을 10미터쯤 앞둔 골목에서 그만 느루를 세워놓고 땅바닥에 주저 앉은 것. ㅠ.ㅠ
다행히도 언덕 아래엔 빨간 옷을 입은 왕비마마가 올라오고 계셨기에 손까지 흔들어 주었는데...
엄마가 반색을 하며 작업실까지 안 가고 돌아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이
나는 차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어지럽고 귀가 윙윙 울리더니 앞이 캄캄해졌다.
운동 안하던 인간이 갑작스레 심한 운동을 해 심장에 무리를 주면 죽을 수도 있다더니
내가 그꼴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덜컥 들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_-;;

다행히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고
세발자국 걷고 다시 주저앉아 머리를 다리 사이로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어서 119를 불러서 병원에 데려가라고 성화를 해대는 와중에
가까스로 괜찮다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

집안에 들어와 누워서도 거의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듯 숨이 가쁘고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옆에서 완전 식겁한 엄마는 우황청심원을 마시고도 계속해서 무서워 엉엉 우시고
나 역시 스스로가 부끄럽고 겁도 나고 하여간 정말로 죽. 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누운 채로 엄마를 달랠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려 혈압을 재달라고 하니
80에 42, 맥박도 5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
엄마는 당장 병원에 가야한다며 또 울음을 터뜨리고...
.
.

저녁까지 계속 누워서 쉬었으므로 당연히 혈압과 맥박은 서서히 회복되었고
지금은 거의 멀쩡하다. ^^*

엄마는 자전거를 사준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괜히 호통을 치시고 지금도 아까 생각만 하면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아.. 민망해 죽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딱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제 체력과 실력도 모르는 주제에 기분만 믿고 무턱대고 난리를 피우다니...
첫날부터 이런 창피한 사건을 벌였으니 앞으로는 정말로 아주 살살 <느루> 타야한다는 무서운 교훈을 얻었다.
ㅠ.ㅠ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할걸.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