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부단

투덜일기 2008. 3. 20. 20:38
<우유부단함>은 내 성격 가운데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좋게 말하면 생각이 많고 신중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매사에 자신이 없고 변덕이 심하며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우유부단함은 곧 시간의 지연과 게으름으로 연결되며 결국엔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도 피해를 미친다.
흔히 우유부단함의 전형적인 인물로 햄릿을 손꼽는데, 멋있게 고민하는 척하다가(실제로도 고민이 심하긴 했겠지만)  결국 해야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죽어나가는 것은 죄없는 주변 사람들이니 참으로 짜증나는 인간유형이 아닐 수 없다.  
멋드러지게 표현하여 햄릿은 이른바 <사유형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 만들기 좋아하는 후대 사람들이
생각해낸 과잉포장일 뿐, 햄릿이 그리 <깊은 사유>를 한 것 같진 않다.
무슨 일이든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나처럼 변덕이 죽끓었겠지.
마지막으로 햄릿을 읽은 것이 대학원 시절이라 당연히 기억도 아스라하므로 이렇게 씹어대는 것이 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의 결론은 우유부단한 인간이 <매우>짜증난다는 사실이다.

아주 옛날에 둥그런 눈이 쏟아질 것처럼 약간 튀어나온 여자 가수가 목청껏 부른 노래가 있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이젠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대강 이런 가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요새 그 노래의 후렴구가 수시로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구시렁거린다.
<웃기지 마라. 살아보니 내 인생이 나의 것인지도 모르겠고, 중대사는 누가 내 대신 좀 심각히 고민하고 화끈하게 결정해주면 좋겠다. 책임은 내가 지더라도...  어른이랍시고 강요되는 의무와 책임은 왜 또 그리 많은지. 정신연령은 크게 성장하지 못했건만 매순간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는 인생은 가끔 너무 버겁단다.>

원래부터 논리적인 사고력은 그리 뛰어난 인간이 아니었고 결단력과 행동력도 꽤나 떨어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도무지 결단을 못내리고 이랬다 저랬다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 정말 환장 일보 직전이다.
 
작업실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난 9개월간 작업실에 나올 수 있었던 날은 한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비워둔 날이 많았으니
논리적으로 따지면 당장 문을 닫아야 옳다.
사실 이 정도의 작업실은 더 욕심만 안 부리면 언제든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3년 번역인생 가운데 작업실을 가졌던 건 겨우 마지막 4년. 처음 9년은 당연히 집에서 일했으니
새삼 못할 것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90%는 작업실을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 가닥을 잡았는데 나머지 10%가 도저히 포기가 안되는 거다.
알량한 핑계는 작업실 소파와 책상을 집으로 가져가려면 트럭을 불러야할 텐데 그게 귀찮고
좁은 집에 놓을 데도 마땅치 않다는 것. -_-;;
그리고 가끔은 홀로 도망쳐 나올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연 5백만원 정도의 유지비를 완전히 <낭비>하면서라도 마냥 비워두게 될지도 모를 작업실을 유지하는 건
확실히 사치이고 미친 짓인데... 그런데도 포기가 안된다. ㅋ
아마도 그건, 완전한 독립이 거의 불가능한 늙은 딸에게 생겨난 <혼자만의 숨쉴 공간>의 의미가 퍽이나
크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4년간이나 꿰차고 있다보니, 완전 내 집도 아니면서 마치 내 소유인 것 같은 느낌이고
작업실에서 하는 일과 집에서 하는 일엔 엄연한 질적 양적 차이가 존재한다.

휴...
가스비 청구서 챙기러 또 실로 오랜만에 작업실에 나와 앉으니
다시 10%의 미련에 더욱 힘이 실린다.
근데.. 재계약일 한달 전에는 집주인에게 통보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_-;;
혹시... 어영부영 우유부단하게 혼자 끙끙대다 내심 자동 재계약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및 지인들 소집해서 투표라도 해봐야하는 건지 원.

암튼, 커피 한잔 마셨으니 얼른 또 왕비마마께 돌아가야지.
욕심 같아선
아주 가끔, 겨우 한 시간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이 공간을 남겨두는 게 좋겠다고 누가 좀 팍팍 밀어주면 좋겠다.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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