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

삶꾸러미 2006. 10. 26. 19:59
역시 생각과 현실은 늘 괴리감을 떨쳐버릴 수 없나보다.
지인과 차나 커피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담소도 즐겁지만
모름지기 가끔씩은 술을 사이에 두고 약간 느슨하게 풀어진 신경과 감정의 너그러움 속에
희희낙락 나누는 대화야말로 삶의 낙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막상 술자리를 갖고 보니, 숙취 때문에 타격이 만만치가 않다. ㅠ.ㅠ

간만에 술친구를 청한 후배를 만나러 어제 대학로에 나가면서 가슴이 약간 설렜다.
두달간 이스라엘과 터키, 이집트를 둘러보고 돌아왔다니
신비로운 여행담을 안주삼아 최소한 술자리가 2차까진 이어지겠구나 싶었던 거다.

삼겹살묵은지찜에 산사춘 한병을 비우다
그녀석은 술이 안 오른다며 소주를 한병 더 마셨는데
맨날 맥주만 들이키던 나는 산사춘 반병에도 좀 알딸딸했다.
수다에 수다가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우린 다시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겼다.
몇년 전까지 대학로에 직장이 있었던 터라 근처 맛집멋집을 죄다 꿰뚫고 있다더니
역시나 후배가 이끄는 대로 처음 가본 그 술집은 다른 데와 달리 조용하기도 하려니와
높고 기다란 잔에 레몬 한조각을 '깔고' 담아주는 생맥주도 맛있었고
음악도 완전 옛날 노래만 틀어주는 바람에 진짜로 예전 학창시절이나 직딩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서 나는 더욱 유쾌해졌다.
그러느라 분위기에 약한 나는 당연히 과음을 피하지 못했고...


신데렐라 귀가시간에 맞춰 멀쩡히 집에 잘 돌아오긴 했는데
한밤중부터 오히려 취기가 마구 올라와 정신은 몽롱하고
그렇다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새벽녘에 계속 깨서 뒤척이며
처음으로 과음이 숙면에 방해가 된다는 게 맞는 말이란 걸 실감했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의 숙취도 아니건만
결국 난 다음날인 오늘 온종일 병든 닭마냥 비실비실
틈만 나면 피식 쓰러져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느라
일은 커녕 간간이 온 문자메시지도 다 씹고 헤매고야 말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이제 좀 머리가 맑아진 듯 한데
오늘 하루 고스란히 '공친' 걸 생각하니 새삼 몹시 속이 쓰리다.

좋은 사람들이랑 즐거운 대화를 안주 삼아 마셔대는 술자리는 정말 좋은데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고 이리도 후유증에 시달려서야 어디 무서워서 또 술자리에 달려나가겠나... 그 옛날 이틀이 멀다하고 술자리를 즐겼던 나는 어디로 간 건가. ㅜ.ㅜ;;
그렇다고 나란 인간이 금주를 선언할 리는 절대 없다.
대신 그간 엄청 줄어든 알콜분해효소를 차근차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거나 찾아봐야겠다.

그래야 또 비오면 비온다고, 바람 불면 바람분다고, 계절 바뀌면 계절 바뀐다고
온갖 핑계를 대가며 여기저기 사람들 불러내는 걸 취미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까지 취미가 무어냐고 물으면 '음/주/가/무'라고 대답했던 게
부끄럽지 않게 슬슬 다시'수련' 좀 해야겠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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