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아니 조울증 환자 엄마를 어려서부터 지켜보며, 처음엔 아픈 엄마가 낯설고 무서웠고 사춘기땐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상황에 짜증이 났었고, 그다음엔 나도 유전인자를 갖고 있어서 엄마처럼 정신과 환자가 될까봐 더럭 겁이 났다.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이 있을 때도 아니었으니 책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속 시원한 답은 얻기 어려웠다. 시기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른이 된 나는 결국 엄마의 주치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우울증도 유전이 되나요?

엄마를 10년도 넘게 담당하던 민OO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별 걱정을 다 한다고, 유전되지 않으니까 염려 말라고 단박에 나를 안심시켰더랬다. 전문가의 확인으로 내심 안도했던 시기가 몇년은 되었던가? 그러나 그 이후 우울증 및 조울증과 신경증에 관한 책들이 다양하게 출판되기 시작했고, 저자마다 조금씩 주장은 달랐지만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 역시 유전적 요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유전적 요인에 환경적 요인이 더해져서 병이 촉발되는 건 모든 질병이 다 똑같단 얘기.

스콧 스토셀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에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불안증에 시달리는 딸 이야기가 나온다. 지은이는 외할아버지로부터 공황장애와 불안증, 우울 인자를 물려받았다지 아마. 토할까바 두려워 유치원 등원하는 게 공포스러웠던 걸 시작으로 저자의 불안증 역사는 참으로 파란만장하던데, 울 엄마의 조울증 투병 역사도 만만치 않다. 다만 엄마와 외가 친척들이 아는 한 울 엄마 이전에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는 (옛날 사람들 표현대로라면 '미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부디 엄마의 병은 유전이 아니고, 그러므로 우리 삼남매도 비록 엄마의 DNA를 물려받았더라도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기를 빌고 있다. 하긴 중년까지 잘 버텼으면 앞으로도 괜찮을까?

째뜬 난 엄마처럼 마음의 병을 앓고 싶진 않아서 어려서부터 방어기재를 작동시켰던 것 같다. 엄마처럼 하고픈 말을 무조건 참지는 말아야지. 남들 시선과 의견을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지. 예민함이 하늘을 찌를 때면 에라 모르겠다, 다 놓아버리는 연습도 해야지. 화병이 나도록 착한 사람 노릇만 하지는 말아야지. 때로는 사납고 표독스러운 쌈닭이 되어야지. 그리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까발려야지...

어쩌면 남들에게 부담스러운 정보였을지 몰라도 난 누구를 만나든 장기적인 관계로 발전할 전망이 보이는 이들에겐 내가 처한 상황, 특히 엄마의 조울증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던 것 같다. 워낙 자주 앓으셔서 ^^; 아픈 엄마를 온 가족이 번갈아 돌보려면 주변에 티를 안 낼 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거다. 상태가 나빠진 엄마를 혼자 둘 수가 없을 땐 약속을 펑크내야 한다든지, 예약해둔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일도 더러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우울증이나 조울증, 공황장애 환자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덜했던 시절부터 환자의 가족인 난 아무래도 주변에 좀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의 상태를 발견하는 '촉'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불면과 무기력감, 자학하는 태도까지 보이는 친구나 지인을 보면 열심히 설득해 병원진료를 받게 했다. 우울증 약으로 도움 받는 게 뭐가 어때서? 우울증은 뇌에서 나쁜 물질이 나와서, 혹은 좋은 물질이 안 나와서 그러는 거래! 초기에 빨리 시작하면 약으로 완치 된대! 일단 병원에 가보자...

돌이켜보면 그들 가운데서 부모님이나 조부님 세대에 증상을 앓은 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다. 그저 주로 마음 약하고 소심하고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깊은 영향을 받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약을 계속 먹고 치료를 받아도 완치는 되지 못해 혈압약이나 당뇨약 먹듯 매일 신경안정제를 먹는 지인도 있고, 말끔히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언제 그랬었냐는 듯 씩씩하게 잘 사는 지인도 있고, 처방된 약을 먹었다 말았다가 치료에 갈팡질팡하는 지인도 있다. 

기비혼을 가리지 않는 나의 우울증 환자 지인들도 혹시나 자식에게 유전될까봐 걱정하고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집안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고, 확실히 우울감은 전염되기 쉽다는 거다. 점점 와병 기간이 길어지는 엄마 옆에서 시달리다 보면 나 역시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힘들고 슬프고 암울하고...

작년 늦가을부터 겨우내 엄마 상태가 나빠져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내 마감까지 겹쳐 심신이 완전히 피폐해졌을 때 설상가상 다리 통증이 생겼고, 홀로 한밤중에 응급실에 찾아가 덜컥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땐 나의 정신 건강 상태도 정말 말이 아니었다. 엄마는 계속 정신이 온전치 않아 사사건건 내가 보살펴드려야 하는데, 종일 진통제 기운에 누워있다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징징 아파 울면서 끼니를 챙기노라면 어휴... 짐스러운 엄마랑 나랑 둘이 이 세상에서 확 없어져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그런 극단적인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다. 물론 곧바로 어머 이거 우울증 환자의 반응인데! 반성했지만... 

당연히 조울증의 유전 여부에 대해선 의학전문가도 아닌 내가 결론을 내릴 순 없다. 다만 내가 현실에서 겪고 느껴왔던 경험상 100% 유전되진 않겠지만 유전인자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정도?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찾고 무거운 마음은 어디든 털어놓고 주변에 상의하고 조언을 구하고... 지금껏 노력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헤쳐나가면 되겠거니 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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