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투덜일기 2017. 3. 15. 14:56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요즘에도, 수십년간 꿋꿋하게 오래된 다가구 '주택'을 벗어나지 못하고 눌러앉아 살고 있는 우리는 여러모로 옛날 사람이란 걸 사방에 자랑하고 다닌다. 그 중 첫째가 묵직한 쇠로 된 '열쇠'가 아닌가 싶은데, 그나마도 자물쇠 하나가 고장나서 하나만 들고 다닌 건 최근 몇년이고 옛날엔 위아래 열쇠 두 개를 열쇠고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었다. 난 자동차 열쇠까지 열쇠 3개를 매달고 다니며 무거워서 투털투덜하던 적도 있다.

오래된 철제 현관문의 자물쇠는 당연하게도 몇년에 한번씩 고장이 나 말썽을 부렸고, 십년쯤 전부터는 자물쇠를 교체해야할 때마다 우리도 편하게 번호키 좀 달자고 내가 아무리 징징거려도 엄마가 단칼에 '싫다'고 하셨더랬다. 이유도 다양했다.

첫째, 몇만원이면 되는 일반 자물쇠에 비해 번호키는 너무 비싸다. 헌 집에 비싼 거 뭐하러 다냐. (수십년 째 우리는 집이 팔려 이사가는 상상을 늘 하고 산다. ㅠ.ㅠ)

둘째, 손떨려서 번호 잘못 누르면 어쩌냐. 계속 잘못 누르면 아예 잠겨 버려 못 들어온다더라. ㅠ.ㅠ

셋째, 안그래도 깜박깜박하는데 비밀번호 까먹으면 어떡하냐. ㅠ.ㅠ

핑계없는 무덤 없다지만, 엄마가 무조건 싫다고 하시는 건 '변화'를 괜히 두려워하고 겁내는 노인 특유의 고집 때문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나도 독단적으로 마구 우길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엄마 정신 건강이 안 좋아질 때마다 손도 괜히 더 떨리고 불안해지고 익숙하지 않은 걸 불편해하는 심정을 왜 모르겠나. 

그래도 나는 꾸준히 번호키의 편리함을 설파했다. 요즘 번호키 많이 싸졌다. 비밀번호 까먹어도 카드 키만 슥 대면 문 열리는데 무슨 걱정이냐. 설사 카드 키 없이 번호 까먹어도 나한테 전화 걸어서 물어보면 되고, 아니면 수첩 어디에 적어가지고 다니면 되지! 스마트폰 놀이에 심취하면서 손떨림은 이제 거의 없어진 것 같던데! 열쇠 깜빡 잊고 나간 엄마를 위해, 외출하며 열쇠는 우유 주머니에 넣어뒀다고 문자 보내놓고 혹시나 불안해할 이유도 없고 좀 좋냐고요!

그러던 차에 요번에 또 현관 자물쇠가 고장났다. 안에선 고리를 돌리면 잠기는데, 밖에선 열쇠로 암만 돌려봐도 꿈쩍도 하질 않는다. 내부 스프링이나 부품이 또 고장났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번엔 손잡이도 고장나서 보조 자물쇠와 손잡이 모두 바꿔야하는 상황.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데 웬일로 엄마가 먼저 이번엔 우리도 번호키를 달까? 물으셨다. 오예~!

어제 엄마 마음 바뀌기 전에 현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 번호로 득달같이 전화를 걸었더니, 30분 안에 온다던 양반이 10분만에 오토바이타고 나타나심. ㅋㅋ 드드륵드르륵 드릴로 현관 자물쇠를 교체하고 금세 뚝딱 번호키가 달렸다. 우리 현관문에도 드디어 '띠리릭' 경쾌한 디지털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스마트한 세상이 열렸도다! 무거운 쇳덩어리 열쇠는 얼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가장 쉽게 익숙한 번호 네자리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뒤, 엄마 손에 카드 키를 쥐여주곤 연습을 하러 내려갔다. 역시나.. 익숙한 번호 네 자리와 별표시는 아무 무리 없이 한번에 성공! 그래도 번호 누르는 거 귀찮아서 카드키를 들고 다니시겠다고. ㅋㅋㅋ

오늘 아침 일찍 한방진료실에 가느라 외출에서 돌아오신 왕비마마가 띠리릭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와선 한 말씀하신다. 어두울 땐 열쇠 구멍 잘 안보여서 찔러넣기도 힘들었는데, 이렇게 편한 걸 진작 바꿀 걸 그랬다고. 아이고 오마니... 편한게 좋은 거라니까요. 여러가지 면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좋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렇게 하나하나 취향이 무너져가고 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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