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

투덜일기 2016. 9. 29. 21:42

식탐녀는 먹을거리로 계절을 실감한다. 옥수수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덧 홍옥의 계절이 왔다. 열흘쯤 전 경복궁 주변 서촌 과일가게에서 제일 먼저 홍옥을 본 순간, 아 홍옥이다! 외치며 사들고 오고싶었으나... 음주하러 가는 길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며칠 뒤 동네 지하철역 근방에서도 홍옥을 만났다. 

등산갔다 오는 길이었는데... 무겁거나 말거나 10개를 골라 사들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시절부터 세뇌된, 내 뇌리 속 사과의 개념에 꼭 맞는 빛깔과 모양, 새콤달콤한 맛과 아삭한 질감은 역시나 뭐니뭐니해도 홍옥이다. 아으 맛있어라...

오늘도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먹으려고 보니.... 아 이건 또 동화 <백설공주>에서 마녀가 일부러 독을 넣어 공주를 유혹하려고 만든 사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는 분명 이 노란 부분을 깨물겠지. ^^; 나머지는 잔뜩 독이 들었으렸다~!

나는 백설공주 코스프레를 하듯 새빨간 부분부터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당연히 맛있어, 맛있어! ㅋㅋ 추석때 제수용품으로 샀던 큼지막한 홍로 사과는 복불복이어서, 아삭한 것도 있고 푸석한 것도 있고 맛도 제각각이었다. 헌데 이 홍옥은 크기도 작은데 안에 꿀(?)까지 들었다. 진짜로 꿀인지 어쩐지, 꿀사과라고 파는 건 안을 잘라보면 과당이 뭉친 듯 투명한 결정 부분이 존재한다. 근데 홍옥이자 꿀사과라니 꺄오...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다는 생각에 깨물기 전에 이 사진을 찍어놓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노라니 또 다른 사과 생각이 났다. 딱 요정도 크기였던가, 아니 훨씬 작았던가... 낯선 나라 과일가게에서 딱 백설공주에 나올 법한 새빨간 사과를 발견하고는 얼른 골라담아 호텔방에서 아침저녁으로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었더랬다. 


사진으로도 찍었었지.. 싶어 찾아보니 있긴 한데... ㅋ 화질이 아주 구리다. 

사과보다 엄지손가락 거스러미가 더 눈에 띄는 건 자격지심이겠지비... ㅋ 이제보니 터키에서 먹은 이 사과는 훨씬 더 작았었다. 기억에 남은 맛은 오늘 먹은 홍옥보다 좀 더 새콤했던 것 같고, 씹는 질감은 좀 더 단단했다. 그래도 이것은 홍옥이여~ 그러면서 기뻐했었지.  

시간이 기억을 왜곡하고, 일그러진 기억은 또 자체 보정을 거쳐 마치 생생한 '사실'처럼 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을 텐데, 난 '남들보다 좋은 기억력'을 주문처럼 외우며 틀림없는 진실로 남들에게 들이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 또한 꼰대짓이고 옛날 사람 인증이다. 


흠...

한동안 멀리했던 블로그질에 다시 열을 올리는 이유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ㅠ.ㅠ 번역서의 역자후기 마무리를 도무지 하지 못해서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제대로 생각이 들어가고 고민이 깃든 글을 쓰지 않다보니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 

책도 안 읽으면서 무슨 글 타령이냐 싶고, 머리가 드디어 깡통이 되었구나 반성하며 그래도 방바닥에 굴러다는 책 가운데 젤 만만한 걸로 집어들었더니 거기서, 매일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어야 글 쓸 자격이 있다는 글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맞다.  매일 써지는 글의 가벼움과 한계도 물론 존재하지만, 어쨌든 어딘가 몇줄이라도 생각을 적어놓는다는 것의 즐거움이 분명 있었는데, 더는 진득하게 앉아서 배설해내는 짓거리도 하지 않고 살았구나 싶었다. 여기다도 후다다닥 얄팍한 자랑 아니면 푸념만 반복했을 뿐.

하여간에 그래서 또 이렇게 반성모드로 포스팅을 하다보면 글이 글을, 하나의 생각이 또 다른 아이디어를 물고 꼬리를 잇는 마법 같은 것이 벌어지려나 기대하면서 이렇게 낑낑대고 있다. 이러면서 난 어떻게 글줄로 밥벌이를 계속 하려는 것이었는지? 참 나. 어이가 없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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