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투덜일기 2016. 6. 1. 15:35


일년내내 책 한권 읽지 않으면서 매년 노벨문학상을 기대하는 한국인들을 비아냥거리는 기사가 언젠가 뉴욕타임스에 실렸다고 했던가.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스마트폰과 그밖의 쉽고 재미난 오락거리 탓에 독서인구가 줄어드는 건 전 세계적인 추세라고 해도, 책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국사람들의 비율은 절망스러울 정도다. 특히 나처럼 책에 기대어 밥벌이를 해야하는 사람에겐 말이다.


어쨌든 요즘들어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맨부커상>에 대해서 내게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엊그제는 70대이신 어느 선배님이 조용히 나를 따로 불러 물으셨다. 맨부커상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상인가? 근데 왜 난 금시초문이지? 내가 무식한 거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냐... 너는 읽어봤냐... ㅋㅋ 


일단 나 역시 세계 3대 문학상이란 게 있는 줄도 몰랐다고 대답했다. 노벨상이랑 맨부커랑 또 뭐라더라...? 

물론 맨부커상의 존재는 알고 있었고 수상작을 더러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출판계에 꽤나 몸을 담고 있었고 외국소설도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단언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7,80퍼센트는 이번에 한강의 책이 후보작에 올라 연일 뉴스에 언급되기 전에는, 아니 후보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며칠 언급되다 수상에 실패했다면 또 다시 그런 게 있는지조차 관심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에 수상을 했고, 김연아, 박태환 때처럼 개인의 성취를 마치 국가의 쾌거인양 '한국이 해냈다'는 식으로 언론에 도배질을 해댔기 때문에 전 국민이 관심을 쏟아 열흘만엔가 50만부가 팔렸겠지. 


어떤 책이든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책 구매로 이어졌다면 무조건 반길 일이다. 일시적인 냄비현상이든 아니든, 소비 둔화의 최일선에 놓여 간당간당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듯한 출판계에서 한두권이라도 집중 조명을 받아 책이 팔린다는 게 어디냐! 한강의 소설이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군중심리와 호기심에 휩쓸려 덜컥 책을 산 사람들이 진짜로 완독을 하거나 애서가가 되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선진국 따라하기 좋아하는 근성이 이번에도 발휘되어 노상 자기개발서나 힐링용 에세이만 읽어대던 사람들이 '문학'을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째뜬 나 역시 한강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고(공모전 출신 한국 소설가와 주류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은 잘 안없어진다. ㅠ.ㅠ <소년이 온다>는 출간됐을 때 서점에서 좀 넘겨보다 말았다.) 맨부커상은 오르한 파묵, 줄리언 반스 같은 작가가 탔었는데(<내이름은 빨강>,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같은 책 들어보셨세요?--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한 것 같다고 대답해 노년의 선배님을 안심시켜드렸다. 째뜬 그분은 워낙에도 계속 공부에 힘쓰며 더러 서점에 가서 책도 사시는 터라, 이참에 책을 사보실 요량인듯. 쉽게 설렁설렁 읽히는 책은 아닐 거라고 미리 귀띔하며 다 읽고 어땠는지 알려주시라고 부탁했다. 상빨 받은 <채식주의자>가 50만부 팔렸다니깐 어째 나는 영 사주고 싶지가 않아서 원... +_+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에 관한 논란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이참에 출판계가 반짝 되살아나, 마케팅비와 물류비 아까워서 다 만들어놓은 책도 묻혀놓고 눈치만 보고 있는 많은 출판사들이 다시 움직여주는 계기가 되기를 열렬히 빌고 있다. 그래야 나도 먹고 살텐데!


눈물겹게도 5월말을 기점으로 드디어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에서 백수의 신세로 전락했다. 전업 번역가로 밥벌이를 시작한지 21년만의 일이다. ㅠ.ㅠ 중간에 용감하게 대학원공부를 빌미로 일을 쉬었을 때에도(2000년), 2013년에 미친 척 자체 안식년을 결정했을 때에도 놀랍게도 번역 일 의뢰는 거의 끊이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할 일이지만,  건방지게 일을 쉬어야하는 사정을 이야기하면, 계약기한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방학 때 맞춰 일을 해달라는 곳도 있었고, 안식년 운운했을 땐 '이러시면 안된다!'고 설득해 6개월만에 휴식을 접게 만드는 출판사도 있었다. 내 게으름 때문에 따박따박 일을 못넘긴 탓도 있지만, 길게는 1년, 짧게도 6개월치 계약은 늘 밑바닥에 <깔아놓고> 일을 해왔던 것 같은데.... 그런데.... 작년 말부터 정말이지 새로운 번역의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어떻게 작업 시간 되느냐고 묻는 전화나 이메일도 한 통 없는지!!? ㅠ.ㅠ


해서 작년에 미리 계약해두었던 올 1/4분기 작업건을 끝으로 원숭이는 완전히 줄을 놓치고야 말았다. 땅바닥에 아프게 떨어져서 뒹굴뒹굴... 아.. 정말 슬프다.  (물론 업계 일부 친구들은 내가 그간 계속 일이 끊기지 않았던 게 놀라운 미스터리라고 이야기한다. 같이 번역 시작했다가 접은 이들도 많으니깐)


요즘 백수라고, 일 없어서 한가하다고 말하면, 이 참에 여행도 다니고, 자주 만나 같이 놀자는 친구들도 있지만 몇년째 5월마다 종합소득세 신고하며 푹푹 한숨을 쉬었던 저연봉 프리랜서에겐 모든 게 사치 같다. 사정 모르는 어느 후배가, 선배님은 이제 일 안하고 사셔도 되지 않아요? 라고 물었을 때 어찌나 속이 쓰리던지! 젊어서도 그랬고 얼마전까지도 나는 나 한 사람쯤은 평생 부양하고 살 능력이 되는 줄 알았었다. 헌데 이젠 그럴 자신감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과연 이 직업으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어가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하나? 지금 이 나이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ㅠ.ㅠ 일단 아르바이트 거리라도 좀 찾아야하나? 

 

누군가는 니가 아직 배가 덜 고팠다면서, 여기저기 연줄을 동원해 먼저 일 좀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한단다. 몸값도 좀 낮추고...  아아악~! 


빌어먹을.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민으로 머리가 아프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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