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에게 자식이 있다면 종종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들먹여 애들 기죽이기에 아주 딱인 친구 딸이 하나 있다. 물론 그집은 딸 둘 모두 너무도 모범적이서 노상 칭찬하기 바쁘지만, 두 딸 중에서도 특히 첫째는 지금 스물세살인데 내가 생각해도 존경스러운 아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벌써 오래전이지만 고등학교 입시 때, 특목고에 충분히 갈 실력임에도 일반고를 선택했다. 친구 부부는 다행히도 자식의 장래에 대한 계획을 본인에게 맡기는 편. 부모로서 조언은 해도 최종 결정은 아이가 한다. (그래서 나중에 속을 푹푹 끓일망정, 강요는 하지 않는 친구 부부도 물론 훌륭하다) 특목고 아이들만의 괜한 특권의식과 잘난 분위기가 싫다는 것이 아이가 일반고를 선태한 이유.
그러더니 고등학교때 견문을 넓히겠다며 미국으로 '불쑥' 1년간 교환학생을 떠났다(나중에 듣자하니 수능 준비엔 엄청난 손실이라나 뭐라나...) .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보니 분위기며 전망이며, 미국에서 대학을 진학하는 게 이롭겠다는 주변의 조언과 압력(?)이 많았단다. SAT를 준비한다기에 모두들 당연히 미국 대학으로 입학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이 아이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고3으로 복학했다. 이유? 미국 대학에서 막상 입학허가를 받고보니 외국인 학생이라 등록금이 어마어마하더란다. 한국에서 대학에 들어가면 자기네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을 다 대주는데(!), 등록금에다 체류비까지 괜한 돈 들이며 부모 등골 파먹기 싫다는 것이 아이가 귀국을 선택한 이유였다. (정작 부모는 생활비 아껴 유학 비용 대줄 용의가 있었는데도! 친구는 오히려 불리하게 고3 직전에 귀국해 복학한 딸을 내심 원망했었다. 남들은 일부러 유학도 가는데.. 그러면서)
특목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수시에선 실패하고, 정시로 엄청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In Seoul에 성공한 아이는 동아리 활동이며 성적이며 아르바이트며,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열심히 산다고 했다. 대기업 다니는 아버지네 회사에서 등록금을 전액 대주는데도 굳이 종종 장학금도 받아주시고 ^^; 용돈벌이를 위해 과외는 기본, 아이스크림 푸고 빵 파는 아르바이트도 두개씩 막 해대는 강철 체력과 정열... 어휴...
나는 ㅇㅈ이가 장차 유엔총장이 될 거라고 장담하는 걸 즐기는데, 여기저기 봉사하는 마음으로 보나 통 큰 생각으로보나 실력으로 보나 못할 것도 없다! (영어도 잘하지만 심지어 수학, 물리 이딴 거 좋아하는 이과생!)
하여간에 요즘 웬만한 대학생들은 그놈의 '스펙' 때문에 어학 연수나 교환 학생 다녀오는 게 필수란다. 어차피 요새는 대학도 돈이 있어야, 사교육비를 펑펑 써야 갈 수 있는 시대이고, 간신히 입시에 성공해도 제손으로 등록금을 벌어야하는 학자금 융자파 아이들은 그런 스펙 쌓기 경쟁에서도 당연히 밀려난다. 으휴, 알수록 썩은 세상.
암튼 친구는 2학년 마치고 덜컥 휴학을 결정한 큰딸이 그 필수 코스를 밟는다고 할 줄 알았단다. 그러나 이 아이는 무조건적인 스펙 쌓기보다는 차라리 배낭여행을 떠나겠다며 돈 모으기에 돌입했다. (아 물론, 대학시절 배낭 여행도 취업용 자기소개서를 다채롭게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이란 말도 있다 ㅠ.ㅠ) 과외 말고도 시간제 알바를 두세 탕씩 뛰면서... (동시에 연애도 하면서!)
친구 말로는 ㅇㅈ이가 그렇게 악착같이 9개월간 매일매일 알바로 번 돈이 무려 1600만원. 결국 ㅇㅈ이는 부모에게 단돈 한푼도 손 벌리지 않은 채 자력으로 지난 10월 4개월 여정으로 남미 여행을 떠났다. 그보다 먼저 초여름엔 유럽 한바퀴 돌아주시었고... (테러 발생 이전에 다녀온 것도 어찌나 선견지명이 있는지 원..)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래 사진들은 얼마 전 ㅇㅈ이가 쿠바 아바나에서 찍어보낸 사진들이다.
멕시코는 어딜 가나 프리다 칼로로, 쿠바는 체 게바라로 먹고사는 것 같다고... ㅎㅎ
남미가 대체로 인터넷 환경이 좋질 않아서 친구 부부는 벌써 두달째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매일 무사하다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아오... 가끔 친구가 전달해주는 남미의 그림 같은 사진들에 감탄하고 반색하며 부럽다, 멋지다, 훌륭하다... 칭찬하기에만 바쁜 나는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은 친구의 걱정을 위로하다말고 종종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실감하는 건... 아... 역시 나는 엄마 입장이 아니고 딸 입장에 더 감정이입이 되는구나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싶다. 길 미끄러운 데 울 엄니가 나돌아댕기면 나도 괜한 걱정과 망상에 휩쓸린다. 나의 조카가 나중에 커서 배낭여행을 떠난다면 나 역시 전전긍긍 염려하고 앉아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재난이라든지 테러에 휩쓸리는 게 아닌 한, 믿을만한 사람이 자신의 의지대로 헤치고 나가는 길이라면 그냥 지켜보며 박수쳐주기만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고!!?? 경솔하게 일부러 위험 지역으로 찾아들어갈 아이도 아니고, 듣자하니 놀라운 친화력으로 가는 곳마다 친구들을 만드는 것 같던데... 나 원 참..
가끔 넌 자식이 없어서 절대 부모 마음 모른다는 둥, 본인이 닥쳐보지 않으면 짐작도 못한다는 둥 내 기를 팍팍 죽이는 말을 듣는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영 철이 안들어 어른 취급을 해줄 수 없다는 이도 있었다. 그 사람이랑은 관계를 끊어버렸지만... 암튼 글쎄... 꼭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나? 4대강은 반드시 국토를 죽이는 사업이라든지, 아라뱃길은 괜한 돈지랄이라든지...
과연 내가 어떤 엄마가 됐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고 결코 알 수도 없는 일지만, 어쨌든 내가 잘 아는 '딸의 입장'에서 볼 때 엄마들이란 그저 걱정하는 것이 본능이고 직업이겠으나 앞가림 잘 하는 딸이라면 괜한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이토록 시스템이 엉망진창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더 걱정이구만 뭘...
친구가 마지막으로 전달해준 ㅇㅈ이의 여행지 사진은 갈라파고스였다. ㅠ.ㅠ 바닷가에서 이렇게 물개들이랑 거북이랑 같이 헤엄치며 노신다고... 아.. 난 그저 ㅇㅈ이의 용기와 젊음과 열정과 추진력이 부럽고 또 부러울 따름이다. 2월에 돌아오면 늙은 이모들이랑 팬미팅하자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