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정리 원칙

투덜일기 2015. 9. 29. 17:28

지지난주엔 까마득한 후배들의 원어연극 공연을 보러갔었다. 대체로 숫기가 없고, 원어 연극도 당연히 '공부'의 일환으로 생각했던 늙다리 선배들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주로 '스펙쌓기'의 목적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기 때문에 배우를 시켜주지 않으면 아예 중간에 빠져버린단다.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면 개인 시간을 죄다 바치면서 몇달간 지속되는 연극 연습을 견뎌낼 동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 옛날 나는 무대에 세워준대도 싫고, 순진하게 그냥 영어로 희곡 작품 하나 통째로 외우는 게 어딘가... 그런 걸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었는데 ㅋㅋ 


암튼 끼 넘치는 후배들의 공연은 해마다 기대치를 갱신하고, 이번에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아마추어 학생들의 원어연극은 그냥 대사만 안까먹고 다 외워도 훌륭하다는 게 관람객으로서 기본적인 입장이지만(요샌 자막도 나와주어서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고 사실 대사 버벅거려도 잘 모른다 ^^), 요즘 애들은 대체로 '연기'가 된다! +_+ 놀라워 놀라워...


하여간 뭐 그 연극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작품에 나왔던 대사가 요즘 계속 생각난다. 등장인물 하나가 책에서 읽은 이야기라며 애인에게 물건 정리 원칙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1. 쓸모가 있는가? (Is it useful?)

2. 나를 기분좋게 해주는 물건인가? (Does it make me happy?)

3. 내가 좋아하는 건가? (Do I love it?) 


이 세 가지 질문에 해당되지 않으면 내다 버리는 게 맞다고 해서, 자기 남편을 내다버렸다(!)는 설명이 이어졌는데 깔깔 웃으며 다들 맞다맞다 박수를 쳤다. 


물론 세 가지에 다 해당되는 물건이나 대상이라면 꼭 곁에 두어야한다는 의미다. 명절을 앞두고 살림을 또 일부 정리하면서 계속 되뇌여보았고, 아직도 집안에 내다버릴 물건이 가득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후배 하나가 어떤 '관계'를 놓고서도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인상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마저도 '쓸모'를 따지는 건 씁쓸하지만, 친구가 아니고서야 주로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접근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친구와 우정이 더 소중한 거겠지. 


근데 그걸 알면서도 사실 무심함을 핑계로 친구와 우정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은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그냥 간간이 떠올리면서 잘 지내겠지, 문득 안부가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먼저 선뜻 연락을 하는 건 민망하고 꺼려지는 기분. 어쩌면 상대는 나를 그간 '관리가 필요한' 인간관계망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 그러니깐 그냥 가만히 있는 쪽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어쩌면 게으름일수도 있겠고. 


무심한 나에게, 너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수가 있다고 경고하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거라는 말도. 으음. 돌연 마음이 스산해서 휴대폰 연락처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전화 한통 걸지 못하고 그냥 또 이렇게 블로그에나 주절주절.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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